곽해룡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에, 지중추부사로 『통문관지』를 편찬한 역관.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주요 관직
역관|판군기감사
목차
정의
고려 후기에, 지중추부사로 『통문관지』를 편찬한 역관.
생애 및 활동사항

1384년(우왕 10) 왕에게 건의하여 무예도감(武藝都監)을 설치하였다. 1385년 역관으로 명경(明京)에서 돌아와 명나라 왕이 조서사(詔書使)와 시책사(諡冊使)를 보내온다고 알렸다.

다음 해 안익(安翊)·유화(柳和) 등이 난징(南京)에서 돌아와 명나라가 “비단 1만 필과 무명 4만 필을 가지고 와서 말 5천 필을 사려고 한다.”하니, 곧 왕은 곽해룡을 사신으로 명나라에 보내어 “우리 나라에는 말이 많지 않고 또 키가 작아서 별로 쓸모가 없으니 값을 받을 수 없다.”하고, 다만 요구해 온 말 5천 필만 무상으로 보내겠다고 하였다.

다음 해 2월에 곽해룡이 명경에 다녀와서 명나라에서는 결코 무상으로는 말을 받을 수 없다고 하니 물품과 물품으로써 교환하되 말 1필당 포(布) 8필, 비단 2필로 하여 교역할 것을 건의하였다. 벼슬은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를 지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집필자
이상선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