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년(의종 24)정중부(鄭仲夫) 등에 의해 무신정권이 성립되면서 신분질서의 해이와 하극상의 풍조로 사회적 동요가 심했으며, 아울러 지방관의 탐학과 빈곤에 시달리던 농민·노예 등 하층민에 의한 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광명·계발의 난도 그 중의 하나였다.
이 난이 일어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하여 1200년(신종 3)진주에서 주리(州吏) 정방의(鄭方義)와 정창대(鄭昌大) 형제가 반란을 일으켜 평소에 원수진 사람들을 많이 죽이며 횡포를 부리자, 진주사람 20여 명이 정방의를 치고자 광명·계발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광명·계발은 이에 응하여 진주에 이르렀다가 오히려 정방의에게 크게 패하였다. 더구나 광명·계발의 본거지인 합주의 노올부곡(奴兀部曲)까지도 정방의에게 완전히 소탕당하고 말았다.
이 난은 원래 부곡 천민들이 일으킨 것으로, 다른 지역에까지 그 영향이 파급되어 당시 곳곳에서 지방 주리에 대항하는 민란의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