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란 삶의 실존적 정황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부정적 상태가 종교경험을 통해 이상적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을 뜻한다. 종교를 인간의 개인적 실존이나 공동체적 현존의 궁극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실제적인 수단이라고 이해한다면, 구원은 종교의 근원적인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구원의 내용이나 구원에 이르는 과정의 서술은 바로 그 종교의 특성을 마련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구원에의 동기는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현실적인 삶에서 비롯되는 직접적인 부정적 정황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질병이나 재앙, 삶의 여러 측면에서 부딪치는 고통 등이 그것이다. 둘째, 의미나 가치, 보람이나 진리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비롯하는 해답에의 추구이다. 삶의 존재론적 근거라든가 종국적 지향, 또는 삶 자체의 완성이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물음들이 그러한 예이다.
두 번째 동기는 그 실천 과정에서 다시 두 가지 유형의 구조를 지니고 전개된다. 하나는 구원의 실현을 신적 힘의 개입을 통하여 이루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려는 것이다. 첫 번째 경우는 초월적인 존재나 원리, 그리고 절대적 힘에의 자기 봉헌이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 두 번째 경우는 스스로 초월적인 힘이나 절대적인 힘과 합일적인 존재가 되려는 적극적 태도를 그 근간으로 하고 있다.
구원의 결과에서도 두 가지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하나는 차안적(此岸的)인 결과를 기대하고 실현하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피안적인 데서 그 결과를 기대하고 실현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분들은 실제에 있어서는 상호 중층적이고 복합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명확하게 구획될 수는 없다. 구원관을 통해 종교를 비교한다면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 등은 타력 종교의 범주에 속하고, 유교·불교 등은 자력 종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무속은 양쪽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구원’이라고 하는 용어가 종교용어로 일반화된 것은 그리스도교 전래 이후의 일이다. 예를 들면 사람됨의 근거가 인(仁)이요 덕(德)이며,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도(道)라고 하는 주장 속에서 유교는 구원의 개념을 충분히 함축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명확하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불교에서도 제도(濟度)나 해탈(解脫)이라는 말로 사성제(四聖諦: 네 가지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통한 열반(涅槃)에의 이름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신의 아들로 고백하고 그를 구세주로 믿어 신의 자녀가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구원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이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 구원이라는 용어는 유교의 구원관이라든지 불교의 구원관이라고 하는 용례에서 보듯이, 종교의 이상을 언급하는 일반적인 용어가 되어가고 있다.
(1) 전통신앙의 구원관 우리나라에서의 구원관의 전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전통신앙의 구원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전통신앙은 제천의례를 통해 나타나는 천신신앙(天神信仰), 무당과 굿을 중심으로 하는 무속신앙, 그 이외의 자연스러운 종교적 동기를 실현하는 민간신앙 등이 있다. 그러나 그 양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전통신앙의 구원관은 현실적인 삶에서의 기복양재(祈福禳災)라고 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빈곤이 풍요로 바뀌고, 질병이 치유되며, 불의의 재난이 예방되고, 불행이 행복이 되는 것을 구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 구원을 이루는 직접적인 가능성은 삶의 여러 기능과 관련된 신이나 신성한 힘, 곧 의인화된 초월적 힘이다. 그러므로 그 힘의 예배, 위무(慰撫) 등이 구원을 성취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위가 된다. 현세적인 삶이 주가 되는 이러한 전통신앙적인 구원관의 지배적인 특성 속에는 내세적인 보상의 개념도 함축되어 있다. 조상이 제의대상으로 된다거나 사령(死靈)에 대한 위로와 기원이 행하여지고 있음은 그 예이다. 따라서 죽음의 문제는 삶의 현실성과 아울러 구원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전통신앙의 구원관은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이른바 외래종교인 불교·유교·그리스도교 등에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각 종교는 한국적인 독특한 불교적 구원관이라든가 유교적 구원관, 혹은 그리스도교적 구원관을 형성하고 있다.
(2) 불교의 구원관 불교는 본래적인 자신의 구원관에 덧붙여 불전에 음식과 돈을 놓고 질병의 치유와 소원 성취를 빌어서 이를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이른바 불공(佛供)을 중요한 구원의 제의로 수용하고 있다. 불교는 전통신앙을 비롯해 다른 종교의 요소를 구원관의 형성에 수용한다. 예를 들어 불교의 죽은 사람을 위한 재(齋)도 전통신앙의 망자(亡者)를 위한 제의들이 지닌 구원관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불공의 대상이 되는 신이 산신(山神)·칠성신(七星神)·용신(龍神)이 되고 있는 것도 도교의 영향과 아울러 민간신앙이 불교적 구원관 안에 수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불교는 전통신앙으로 하여금 구원의 상징체계를 세련화시켜 원초적인 단순성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예를 들면 원융사상(圓融思想)·관음신앙이나 미륵신앙, 그리고 정형화된 소재의례(消災儀禮)·사자의례(死者儀禮)·영혼천도의례(靈魂薦度儀禮) 등이 그러한 것이다. 특별히 불교의 가르침이 지니고 있는 논리적인 번거로움이 없이도 인간이 지니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제거해주는 관음보살을 부르고,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있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염불함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죽음에의 두려움에서조차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은 우리나라 종교문화에서 지울 수 없는 뿌리 깊은 구원의 신념이 되고 있다. 도솔천(兜率天)에 상생(上生)해 있으나 미래에 이 세상에 하강하리라는 미륵불에의 신앙은 역사와 사회의 변혁을 기대하는 구원에의 신앙내용이 되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불교의 구원관은 우리의 종교문화가 지니고 있는 구원관의 신비적 윤색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 유교적 구원관은 우리의 전통 구원관의 합리적 윤색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3) 유교의 구원관 유교를 이른바 성덕지학(成德之學)이라는 기본 이해 속에서 크게 경학(經學)과 예속(禮俗)으로 나누어 본다면, 유교의 구원관은 합리적 추론의 이성적 규범을 마련해주고, 삶의 실천적 수행의 상징적 의미의 세계를 규범화해준 것으로 묘사할 수가 있다. 인생과 우주의 근원을 형이상학적으로 해명하려는 노력, 그러한 논변이 가치 규범으로서의 의리정신(義理精神)과 행동 양식으로서의 예(禮)의 기초가 되면서 지행합일(知行合一)·경세치용(經世致用)을 거쳐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이르는 일련의 유교적 전개는 전통종교나 불교의 구원관이 미처 포용하지 못한 내용을 스스로의 구원의 논리 속에 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 때문에 유교는 그 구원관이 다만 식자(識者)나 치자(治者)의 삶에 한정되는 현실을 빚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는 보다 현실적인 구체적 삶 속에서 전통종교의 구원관과 융합하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의 현실적 규범이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정형으로 정착하고 있음은 그 하나의 예이다.
유교는 혈연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 가족의 가례(家禮)를 확립해줌으로써 가족은 각 성원으로 하여금 구원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자리가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실천되는 효(孝)는 가장 중요한 윤리가 됨으로써 사람다움을 기하는 규범이 된 것이다. 특히, 전통적인 무속신앙이나 장속(葬俗)에 함축되어 있던 내세(來世)나 망자(亡者)와의 관계는 제례(祭禮)를 통해 산 자와 죽은 자가 아울러 살아가는 연대감을 창출해냄으로써 누구나 종교 공동체의 일원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와 같이 혈연으로서의 가족이 그대로 종교 공동체를 이룬 것은 구원의 이상을 가족으로부터 비롯해 가족에로 귀일하게 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사실 때문에 유교는 퇴색하지 않는 전통적인 관습으로 관혼상제를 통해 그 기능을 유지해가고 있다.
(4) 그리스도교의 구원관 그리스도교의 구원관은 그 문화적 이질성으로 인해 불교나 유교가 지니는 우리 문화와의 친화성보다 더 소원한 것이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는 자기 이외의 여타의 전통신앙이나 종교를 사신우상숭배(邪神偶像崇拜)로 비난함으로써 격한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우리의 전통신앙이 지니고 있는 제천신앙이라든가 무속신앙의 중보자(仲保者: 신과 사람 사이의 중간 매개자) 개념이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창조주와 구세주를 명시함으로써, 의외로 성공적인 구원관의 전개를 우리의 종교문화 속에서 실현하였다.
창조주인 신은 다만 초월적인 힘이나 그 힘의 권화(權化)로서가 아니라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신성의 주체로 여겨지면서, 그 뜻의 실현이 곧 삶의 완성이라는 구원의 개념을 확립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필요충족 기능의 매개자로서가 아니라, 삶의 당위충족 기능으로서의 의미의 매개자로 구세주를 설정함으로써 기복양재가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었다. 특별히 그리스도교는 불교의 수련공동체적 특성이나 유교의 혈연적 제사 공동체적 특성과는 다른 생활 공동체적 성격을 발전시킴으로써, 남녀노소·빈부귀천을 망라하는 집단의 성원과 모든 삶의 영역에 대한 관심을 구원의 내용으로 수렴하고 있다.
위에서 예를 든 전통신앙과 외래 종교와의 구원관의 만남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한국인의 종교경험 속에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신앙을 지니게 하고 있다. 제천신앙·무속신앙·민간신앙·도교·불교·유교·그리스도교 등의 여러 구원관은 자신이 특정한 종교에 속해 있다고 하는 명분상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의식의 심층이나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복합적으로, 혹은 선택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여기에서 한국 종교문화가 지닌 구원관의 특성이 발견된다.
(5) 민족종교의 구원관 근세 이후 새롭게 출현한 민족적 성격의 종교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종교문화의 맥락에서 각기 강조가 다른 독특한 구원관을 전개하고 있다. 천도교는 구원을 현세적인 데 한정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천도교는 한울님이라는 유일하고 지고한 초월적 존재에의 신앙을 요청하면서도 그를 통한 피안에의 구원은 주장하지 않는다.
천도교에서 중요한 것은 그 한울님을 잘 모셔[侍天主] 그분의 뜻을 따라 지공무사(至公無私)하게 각자위심(各者爲心)의 인간을 벗고 부패한 사회와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제하는 개벽이다. 그것이 곧 구원인 것이다. 구원의 성취를 위해서 천도교는 사인여천(事人如天)해야 하고 도성입덕(道成立德)하여 마침내 이상적인 인간인 지상신선(地上神仙)이 되어 제인질병(濟人疾病)하고 포덕천하(布德天下)하며 보국안민(輔國安民)해야 한다고 제시하는데, 이는 구원으로서 개벽의 내용이 되고 있다.
증산교(甑山敎)는 삼계(三界)를 주재하는 지고한 유일신인 증산상제(甑山上帝)를 신앙하면서 그 신의 뜻을 구현하여 사는 것을 구원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구원은 구체적으로 상제의 대순사업(大巡事業)을 계승하여 실천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내용은 혼란한 말대(末代)에서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구원으로 삼고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가달(三妄)인 마음[心]과 기(氣)와 몸[身]이 세 가지 참함(三眞)인 성품[性]과 목숨[命]과 정기[精]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증산상제에게 원도(願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종교는 한울집[天宮]과 육옥(六獄)을 일컬으면서 현세적·현실적인 구원과 아울러 죽음 후의 내세에서의 구원도 밝히고 있다.
종교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각 종교의 구원관도 역사적 정황에 따라 그 내용의 강조가 변천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종교의 구원관은 그 종교가 당대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 어떠한 인식에 기초하고 있으며, 실존적 정황에서 제기되는 물음에 대해 어떻게 해답의 상징체계를 마련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구체적 실증이기도 하다. 종교의 현대적 경향이 구원을 피안보다는 차안에 역점을 두고 있다든지, 구원관이 지닌 상징의 경화 현상이 마침내 그 종교의 쇠퇴나 소멸을 자초하게 한다던가 하는 사실이 그 실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