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능성(綾城). 호는 일오(一梧). 개성 출생. 아버지는 구운회(具運會)이며, 어머니는 마기억(馬箕億)이다.
1931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1936년에 같은 대학 법문학부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해에 대구사범학교의 교유(敎諭 : 일제 때, 중등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광복 때까지 조선어·한문·영어 등을 가르쳤다.
1945년 10월에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의 교수로 취임하였고, 1946년 9월에 보성전문학교가 대학으로 개편됨에 따라 고려대학교 문과대학의 부교수가 되었다. 그 뒤로 고려대학교의 고전국역위원회 위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문학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학 시절에 한국한시사(韓國漢詩史)를 집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연구의 계획을 축소하여 중인·서얼·서리의 한시를 시대별로 정리한 「조선평민문학사(朝鮮平民文學史)」(1936)를 대학 졸업논문으로 제출하였다. 뒤에 이 논문을 수정, 보완하여 1947년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그는 평민문학이 근대문학으로 성장하였다는 시각에서 동아시아 근대문학의 형성에 대한 연구를 계획하고, 하버드-옌칭학회로부터 연구비까지 받았으나, 병으로 이 연구를 마무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56년에 낸 『국문학사』에서, 간결하게 고전문학·구비문학·한문학·현대문학을 포괄적으로 다루면서,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연계관계에 대하여도 언급하였다. 그밖에 번역으로 『국역파한집·용재총화』(1964), 교주본 「춘향전」(1970)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한말우국경시가(韓末憂國警時歌)에 대하여」(1959)·「근세적 문인 장혼(張混)에 대하여」 (1963) 등이 있다. 작고한 뒤에 문하생들이 유고간행회를 조직하여 김형규(金亨奎)의 서문과 연보 등을 붙인 『국문학논고(國文學論藁)』(1965)를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