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익산시, 서쪽은 황해, 남쪽은 만경강(萬頃江)을 경계로 김제시, 북쪽은 금강을 경계로 충청남도 서천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5°57′∼126°54′, 북위 35°43′∼36°07′에 위치한다. 면적은 395.82㎢이고, 인구는 27만 8398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10개 면, 16개 행정동(52개 법정동), 337개 행정리(76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조촌동에 있다.
대표적인 평야지대로 대부분의 지역이 퇴적층이 두꺼운 충적평야와 낮은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다.
북동부의 일부 지역에만 망해산(望海山, 230m) · 취성산(鷲城山, 205m) · 오성산(五聖山, 228m) · 고봉산(高峰山, 153m) · 대초산(大草山, 147m) 등 선캄브리아기의 편암과 편마암을 기반암으로 하는 200m 내외의 낮은 산지가 분포하고 있다.
금강 하구부에 위치한 시가지에 인접하여 차령산맥의 말단부인 장계산(長溪山, 110m) · 월명산(月明山, 112m) · 천방산(千房山, 120m) 등의 구릉성 산지가 있으며, 그 밖에 시의 남쪽에 금성산(錦城山, 125m), 남서쪽에 영병산(領兵山, 120m) 등이 있다. 영병산 일대는 100여m 내외의 낮은 산지이지만 주변이 낮고 평탄한 충적평야여서 이들 산지 주변에 구릉지대가 약간 발달해 있으며, 시의 대부분은 충적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과 남쪽의 시계를 따라 금강과 만경강이 서류하여 황해로 흘러들며, 탑천(塔川)이 시의 동부에서 남서류하여 대야면 광교리에서 만경강 하구 부근으로 흘러든다. 경포천(京浦川)과 구암천(龜巖川)이 시가지를 흘러 금강에 합류하며, 어은천(漁隱川)은 시의 동부에서 남류하여 만경강에 합류한다. 이들 하천은 감조구간이 길기 때문에 하류에 배수갑문을 설치하여 바닷물의 유입을 막고 농업용수로 이용하고 있다.
금강과 만경강의 하구에는 넓은 간석지가 잘 발달되어 있는데 이들 간석지는 일제강점기 이후로 간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현재에도 군장간척사업과 새만금간척사업이 진행 중으로 해안선이 황해 쪽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황해에는 선유도(仙遊島) · 무녀도(巫女島) · 신시도(新侍島) · 야미도(夜味島) 등 고군산군도의 여러 섬과 비응도(飛鷹島) · 어청도(於靑島) · 연도(煙島) 등 유인도 16개, 무인도 47개가 있다.
기후는 남부서안형 기후구에 속하며, 바다의 영향으로 겨울에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눈이 많이 내리고, 여름에는 온난습윤하다. 연평균기온 13°C, 1월 평균기온 -1. 5°C, 8월 평균기온 25°C이며, 연강수량은 1,200mm이다.
구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은 아직 발견된 바 없으나, 인접한 금강유역의 공주 석장리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그 시대의 유물이 발견될 가능성은 많다.
또한 금강 하구인 내흥동 사옥(沙玉) 패총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인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발견됨에 따라, 서해안과 금강 하구 지방에 신석기인들이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토로 막로국(莫盧國) · 만로국(萬盧國) · 임소반국(臨素半國) · 비리국(卑離國) 등의 소국이 이 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마서량현(馬西良縣) · 부부리현(夫夫里縣) · 피산현(陂山縣) · 시산군(屎山郡)이 있어 중국과의 교역 창구 구실을 하였으며, 군사상의 요지로서 중요시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시산군은 임피군(臨陂郡)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때 마서량현은 옥구현으로, 부부리현은 회미현(澮尾縣)으로, 감물아현은 함열현(咸悅縣)으로 개칭되어 모두 임피군에 영속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이 지방은 대륙 세력에 맞선 해안의 요지인 동시에 대륙 문물의 교류지였다.
왕건은 후백제를 멸망시킨 뒤 940년(태조 23)에 지방제도를 정비했는데, 1018년(현종 9) 임피군이 임피현으로 강등되어 현령이 설치되었으며 옥구 · 회미 · 부윤(富潤) · 만경(萬頃) 등 4개 현을 속현으로 거느렸다. 고려시대에는 국초부터 조운이 제도화되었는데, 당시 이 지방에는 전라도지방의 조세미를 거두어 서울의 경창까지 운반하는 구실을 하였던 진성창(鎭城倉)이 있었다.
또한, 고려말에는 왜구가 자주 침범했는데, 특히 1380년(우왕 6) 최무선(崔茂宣) · 심덕부(沈德符) · 나세(羅世) 등이 왜적선 500여 척을 격침시킨 진포대첩은 왜구를 근절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이 지방은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는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사자암봉수대(獅子巖烽燧臺)를 비롯하여 화산봉수대(花山烽燧臺), 천방산봉수대 등이 산재해 있었다.
1397년(태조 6)에 군산도(群山島)의 진(鎭)을 이 곳으로 옮기고 병마사를 파견하였다. 1403년(태종 3)에는 회미현이 옥구에 영속되었고, 옥구향교 · 임피향교가 창건되었다. 1423년(세종 5)에는 수군만호가 주둔하는 군산포영(群山浦營)을 두고, 병마사를 첨절제사로 바꾸었다가 다시 현감으로 교체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 따르면, 당시 옥구현의 호수는 257호, 인구는 1,194인이었다.
한편 1408년(태종 8) 전라수군영을 전라남도 무안지방으로 옮길 때까지 이 지방에 전라수군절제사영이 있었다. 숙종대에는 염의서원(廉義書院)을 비롯하여 많은 서원이 설립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충청도수사 최호(崔湖)는 칠천량(漆川粱) 해전에서 가토[加藤嘉明]의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조선시대 이 지방은 서해안 방어의 요지로 중시되어 많은 성들이 축성되었으며, 고려 말 왜구의 잦은 침입과 약탈로 인하여 중단되었던 조운이 재개됨에 따라 다시 전라도 조운의 중심지가 되었다.
1895년 23부제를 실시할 때 전주부 관할 옥구군 · 임피군이 되었다. 1896년 13도제 하에서 옥구군은 4등군, 임피군은 4등군으로서 전라북도에 소속되었다. 1899년에 옥구부로 승격되었고, 그해 5월 군산항이 개항되자 개항장의 사무를 관리하기 위하여 옥구감리서가 설치되었으며, 1906년 관제 개편으로 감리서가 폐지되고 옥구부로 개편되었다.
그 뒤 군산부가 창설됨에 따라 1906년 일제의 통감부령에 의해 군산군 이사청(理事廳)이 설치되어 옥구부가 폐지된 1910년까지 두 개의 독립 관서가 양립하면서 행정을 집행하였다. 당시 군산 이사청은 전라북도 북부 일대 지역과 충청남도 남부지역을 관할하였다. 1912년 호남선철도가 개통되고 이어 군산∼익산간 철도가 개통됨에 따라 김제 · 만경 평야를 비롯한 전라도지방의 농산물을 군산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임피군과 함열군의 일부 및 고군산열도 · 비안도 · 어청도 등이 통합되어 옥구군으로 되고 군산부가 분리되었다. 1919년 이 일어나자 군산에서는 3월 3일을 기하여 많은 사람들이 만세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이후 5월까지 28회의 시위가 전개되었다.
근대의 인물로는 을사조약 후에 이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진안 · 장수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1898년 대동단을 조직하려다 발각되어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과 함께 활약한 문형모(文亨謨), 이 지방의 3·1운동 주동자였던 진장권(陳壯權) · 김홍렬(金洪烈), 김좌진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들어가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던 채근우(蔡槿宇), 독립군 자금을 조달하였던 강문주(姜文周), 동산학원(東山學院)을 건립하여 이 고장 교육사업에 힘쓴 정만채(鄭萬采), 근대화의 선각자로서 농촌 의료활동에 일생을 바친 의사 이영춘(李永春)이 있다. 소설가로서 풍자적이며 토속적인 작품을 많이 썼던 채만식(蔡萬植)도 이곳 출신이다.
1949년 군산부가 시로 승격되었으며, 이후 군산시와 옥구군으로 나뉘어 오게 되었다. 1950년 한국동란으로 7월 18일 공산군에게 함락되었으나, 9월 29일 다시 수복되었다. 이때 각급 관청을 비롯한 학교 · 교회 · 주택 등이 잿더미로 변했으나, 그 뒤 전후 복구사업의 실시와 1970년대 근대화의 물결에 힘입어 오늘날의 발전된 모습으로 그 면모를 일신하였다.
옥구군지역은 서해안에 가까이 있는 지역으로 근해어업과 각종 양식업이 성행하고 있다. 1973년 7월 1일 옥구군 일부가 군산시에 편입되었고, 옥구군 서수면 신기리가 인근 익산군으로 편입되었다.
1980년 12월 1일 옥구면과 미면이 미성읍으로 개칭, 승격되었다가 1986년 4월 1일 미성읍 도서지역이 옥도면으로 분리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미성읍이 군산시에 편입되어 미성동으로 되었고, 같은 해 4월 옥구읍 서부출장소가 옥서면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1월 1일 도 · 농 통합에 의해 군산시와 옥구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군산시가 되었다.
1988년 10월 1일 해망동과 신흥동을 통폐합하여 해신동으로, 선양동과 명산동을 통합하여 선양동으로, 중앙1가동과 월명동을 통합하여 월명동으로, 중앙2가동과 중동을 통폐합하여 중앙동으로, 중앙3가동과 미원동을 통폐합하여 중미동으로 각각 개편하였다.
선사시대의 유적으로는 금강하구 연안에 내흥동패총(전라북도 기념물, 1981년 지정)이 있고, 선유도 · 무녀도 등지에서 패총이 발견되었으며, 내흥동패총에서는 돌칼과 토기 조각이 출토되었다.
성터로는 현 군산세관 부근 야산의 옛 성터와, 옥구읍성지 · 임피읍성지 · 회미현성지 · 고진성(古鎭城)을 비롯하여 노인성(老人城) · 어래산성(御來山城) · 도청산성(都廳山城) · 관원산성(官元山城) · 예산성(芮山城) · 남산산성(南山山城) · 성산산성(城山山城) · 테밋산성지[垈山山城] · 박지산성(朴只山城) 등의 산성이 있다.
봉수대로는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突山)을 기점으로 하여 전라도 연안의 이상 유무를 충청남도 서천의 운은산 봉수대에 전하고 내륙으로는 금강하구 연안의 상황을 오성산봉수대에 연결하는 사자암봉수대 · 화산봉수대 · 점방산봉수대를 비롯하여 금강 남안의 오성산봉수대와 불지산봉수대, 그리고 만경강의 지류인 탑천 북쪽에서 사자암봉수대로 연결되는 남산봉수대가 있었다.
주요 사찰로는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이 창건하였다고 하는 천방사(千方寺)를 비롯하여, 은적사(隱寂寺) · 동국사(東國寺) · 흥천사(興天寺) · 불지사(佛智寺) · 보천사(普天寺) · 상주사(上柱寺) 등 많은 사찰이 있다.
불교 유산으로는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개정면의 군산 발산리 석등(보물, 1963년 지정) · 군산 발산리 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용천산성의 팔척석불, 대야면 죽산리의 탑동삼층석탑, 서수면 취동리의 상주사 대웅전, 나포면 장상리의 불지사대웅전, 그리고 선종암(善宗庵)의 삼층석탑이 있다. 탑동삼층석탑은 1974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상주사 대웅전은 1973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불지사 대웅전은 1985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유교 유산으로는 1403년 창건된 옥구읍 상평리의 옥구향교와 옥구향교대성전, 임피면 읍내리의 임피향교와 임피향교대성전이 있으며, 서원은 1685년(숙종 11) 설립된 염의서원(廉義書院)과 옥산서원(玉山書院)이 있고, 사우로는 김유신(金庾信)의 위패를 모신 천방산의 설림사(雪林祠), 조선 말기 문신인 송병선(宋秉璿)을 제향하는 산앙사(山仰祠)가 있다. 옥구향교대성전과 임피향교대성전은 1984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건물로는 옥구읍 상평리의 자천대(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성산면 고봉리의 채원병가옥(전라북도 민속자료, 1986년 지정), 임피면 읍내리의 노성당(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990년 지정)이 있다.
문헌은 조선조 12대 열성(列聖)의 친필을 담은 열성어필첩(列聖御筆帖)이 있다.
무형유산으로는 판소리(춘향가, 최란수), 악기장(단소제작, 고이곤)이 있다. 앉은굿(독경, 최갑선)은 2001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으나 2014년 해제되었다.
노거수로는 월명공원과 수덕산 · 문화동 · 미륭동의 팽나무와 나운동의 느티나무, 성산면 창오리의 버드나무, 임피면의 소나무, 회현면의 오봉산 느티나무, 서수면의 은행나무 등이 있다.
군산은 고려시대부터 조운의 중심지였으며, 보안(保安)의 안흥창(安興倉)과 임피의 진성창(鎭城倉)의 조세미(租稅米)를 서울의 경창으로 운반하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또한, 군산 앞바다에 있는 금강하구는 1380년(우왕 6) 최무선이 왜적선 500여 척을 불사른 진포대첩지(鎭浦大捷址)이다. 이 밖에도 개정면 발산리의 최호장군유지(전라북도 기념물, 1976년 지정)가 있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옥구향교와 임피향교가 있었다. 옥구읍 상평리에 있는 옥구향교는 1403년(태종 3)옥구읍 이곡리에 창건되었다가 1484년(성종 15)옥구읍 상평리광명산 북쪽으로 이전하였으며, 1646년(인조 24)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임피향교는 1403년임피면 취산리에 창건되어, 1630년임피면 미원리로 이전했다가, 1710년(숙종 36)에 현재의 위치인 임피면 읍내리로 이전하였다.
이밖에 1664년(현종 5)임피면 미원리에 봉암서원(鳳巖書院)이 창건되어 1695년에 사액되었다가,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에 의해 훼철되었다. 또한 옥산면 당북리의 염의서원(廉義書院)은 1685년에 창건되어 1804년(순조 4)에 사액되었고,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0년에 복원되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 1903년 구암동에 영명학교(永明學校), 둔율동에 금호학교(錦湖學校)가 설립되었고, 이어서 1906년 옥구군수 이교영(李喬榮)이 지방유지들과 함께 사립진명학교를 설립하여 1914년 옥구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06년 사립보통학교와 1907년에 사립흥영학교가 창립되었다가 이듬 해 양교를 병합하여 사립임영학교가 되었고, 1911년 사립임피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관학으로 1907년 군산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고, 1912년에 임피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였으며 뒤에 임피공립국민학교가 되었다.
중등교육기관으로는 1910년 군산공립실업학교가, 1916년에는 군산여자중학교가 설립되었다. 1922년에 일본인 교육기관으로 군산중학교가 설립되어 일본인 학생만을 교육하다가, 광복 후 한국인 교육기관이 되었다. 1959년 설립된 군산종합고등학교는 1975년 군산기계공업고등학교와 군산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56개교, 중학교 19개교, 고등학교 12개교, 특수학교 1개교가 있으며, 국립군산대학교 · 호원대학교 · 군산간호대학교 · 군장대학교 · 서해대학교가 있다.
대표적인 문화예술단체인 군산국악원은 1966년에 설립되었고, 1969년에 설립된 한국예술인단체총연합회 군산지부는 산하 8개 협회를 통해 문화예술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1970년부터 개최된 군산예술제는 시화전 · 미술전 · 사진전 · 무용의 밤 · 국악잔치 · 음악회 등으로 구분하여 본격적인 문화활동을 펴고 있다. 또한, 1983년 시립합창단, 1990년 시립향악단이 창단되었으며, 1989년 완공한 시민문화회관은 문화예술 발달의 요람이 되고 있다.
군산항은 다른 도시에 비하여 일본인 미곡상인 · 정미상인 · 잡화상인이 많이 거주하여, 이들의 풍부한 재력에 의해 1902년 전라북도 최초로 주간지 『군산신보(群山新報)』가 발행되었다. 이 신문은 1928년 『군산일보』라는 일간지로 바뀌어 계속 발간되다가, 1941년 일제의 전시언론통제정책의 일환으로 『전북시보(全北時報)』에 통합되었다.
이 고장에는 그네뛰기 · 널뛰기 · 윷놀이 · 술래잡기 · 다리밟기 · 연날리기 · 달맞이 · 달집태우기 · 쥐불놀이 · 지신밟기 · 강강수월래 · 화전놀이 등 많은 놀이가 전해져 오지만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회현지방의 기(旗)맞이놀이를 들 수 있다.
기맞이놀이는 정월 15일과 2월 사이에 날을 잡아서 행하는데, 매년 하는 것이 아니고 농기가 낡아서 기를 새로 만드는 마을이 있을 경우에 행한다. 기는 대략 폭이 2폭에 길이가 15자 가량인 광목으로 만들고 가장자리에는 지네 발을 본뜬 황토색 헝겊을 두르며, 제작 연월일만 적는다.
기를 새로 이루는 마을이 인근 마을에 기맞이할 날짜와 장소를 적은 서신을 전하면 인근 마을들은 기맞을 준비를 한다. 기맞이에 참여하는 마을들에는 서열이 있어 기를 제일 먼저 이룬 마을이 선생마을이 되고 나머지는 제자마을로 이들 역시 기를 이룬 순서에 따라 서열이 정해진다. 이전에 선생마을이었을지라도 새로 기를 만들게 되면 막내제자마을이 되는 것이다.
기맞이는 보통 아침 8∼10시에 시작하는데, 마을의 기들이 모여 제자마을이 선생마을에게 90° 가량 기를 숙여 절을 하면 선생마을은 절하는 시늉만 하고 거드름을 피운다. 기맞이가 끝나면 모든 마을은 세 가닥으로 새끼를 당겨 기를 세워 놓고, 풍물을 치며 종일토록 흥겹게 논다.
해변을 끼고 있는 마을에서는 풍어를 위한 용왕제를 지내고, 내륙 지방에서는 농신제 · 산신제 · 당산제 등을 지내는데, 대표적인 동제로는 나포면 나포리 영신당제(靈神堂祭)를 꼽을 수 있다.
공주산(公主山) 중턱에 당집이 있는데, 이 당집 안에 독을 두고 그 안에 묵은 쌀을 가득 담아 백지로 봉한 뒤 반대기(소래기)를 덮어 할머니 · 할아버지 당산이라 부르며, 여기에서 영신당제를 성대히 거행하는 것이다.
제일은 매년 정월대보름이며, 경비는 마을에서 걸궁굿을 쳐 돈이나 쌀을 각출하여 마련한다. 경비가 걷히면 이를 당지기에게 주어 제물을 준비하게 하고, 동네에서 정결하고 음식솜씨가 좋은 할머니를 모셔다 정월 13일부터 장만하기 시작한다.
음식을 만들 때에는 목욕재계하고 일체 손을 대지 않고 그릇으로만 하며, 말을 해서도 안 되고 맛을 보아서도 안 된다. 음식이 장만되면 당지기가 정월 14일 밤 자정에 당집 뒤에 있는 제단석에 음식을 차려 놓고 산신제를 먼저 지낸다.
이튿날 새벽 5시쯤 바닷가에 있는 위안당(각시당)에서 제를 지내고 다시 영신당으로 와서 제를 지내는데, 이때에는 마을에서 유식하고 그 해 궂은 일이 없는 노인을 제주로 뽑아 제를 지내게 한다.
제주는 축문을 읽고 술을 올린 뒤 재배를 하고 그 해의 풍어와 풍년, 그리고 마을사람들의 행운을 기원하면서 소지를 올린다. 당제가 모두 끝나면 마을사람들은 풍물을 치면서 하루종일 즐겁게 논다.
이 고장의 설화로는 「호랑이와 팥죽」과 같은 우화적 민담과 「장재미와 빗겡이 전설」 등의 지명전설이 다수 전해오고 있다. 이 중 「호랑이와 팥죽」은 「해와 달이 된 오누이」와 같은 유형의 민담이다.
옛날 어떤 할머니가 팥밭을 매고 있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내려와서 밭매기 내기를 하자고 하였다. 이긴 쪽이 진 쪽을 잡아먹기로 한 내기였는데 그만 할머니가 지고 말았다. 할머니는 팥죽이나 한 번 쑤어먹고 잡아먹히겠노라고 호랑이를 설득하였다.
얼마 뒤 팥을 수확해서 죽을 끓이게 되었는데, 이때 파리 · 달걀 · 지게 · 멍석 · 송곳 등이 나타나 팥죽을 얻어먹고는 그 보답으로 할머니를 구해 주겠다고 하였다. 이윽고 밤에 호랑이가 나타나자 파리는 재빨리 불을 끄고, 달걀이 튀어 호랑이의 눈을 멀게 하고, 송곳은 호랑이를 찔러 죽이고, 멍석이 말아서 지게가 갖다버려 할머니는 무사할 수 있었다.
장재미섬과 빗겡이섬은 황해의 고군산열도에 있는 섬으로 각각 바위가 하나씩 서 있다. 장재미에 있는 바위를 장자할머니라 부르고, 빗겡이에 있는 바위는 장자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옛날 이 둘은 부부간이었는데, 장자할아버지는 열심히 공부를 했고, 장자할머니는 정성껏 그 뒷바라지를 하여 마침내 장자할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하게 되었다. 금의환향하는 남편을 맞기 위하여 할머니는 진수성찬을 마련하고 기다렸으나, 남편은 젊은 첩을 데리고 왔다. 할머니의 서운한 마음은 그대로 굳어져 돌이 되었고 덩달아 할아버지와 따라온 모든 사람들도 돌이 되어버려 장재미섬과 빗겡이섬의 바위가 생긴 것이라 한다.
이 밖에도 수천 년 묵은 여우가 부잣집 외동딸에게 장가를 들었다가 인재(人材)를 만나 정체가 탄로나서 죽임을 당하였다는 「여우와 인재 이야기」, 그리고 왕비가 될 운명을 갖고 태어난 처녀가 미천한 사람에게 시집을 가게 되어 죽음을 택하였다는 「오룡묘전설」 등이 전해진다.
민요로는 「불무노래」 · 「만경산타령」 · 「오호타령」 · 「자진산타령」 · 「에이싸오」 · 「위야차소리」 등으로 구성된 대야면 탑동 들노래가 전하고 있다. 또 다른 노동요로서 「밭매기노래」 · 「등짐노래」 · 「길쌈노동요」 · 「뱃노래」 등이 있다.
「불무노래」는 대장간에서 풀무질하면서 부른다. “어화 어화/어얼럼자 어화네/저건너 불머리/쾅쾅 굴러라…… 이내 쇠를 두둘기어/임옥들을 다파보세/어화 어화네.”와 같이 농기구를 만들어 그것으로 임피 · 옥구 들판을 일구어 보자는 내용이다.
「만경산타령」은 만도리(마지막 김매기)할 때 부르는 것으로 “……너는 죽어서 무엇이 되냐/나는 죽어서나 무엇이 될거나/에야라뒤야라 에헤에야/에야뒤야 산이로구나/일락서산의 해가 떨어지면/월출동녘의 달이 솟아온다/에야라뒤야라 에헤에야/에야뒤야 산이로구나…….”처럼 부른다.
「오호타령」은 일명 「방아타령」이라고도 하고, 「위야차소리」는 「몬들가락」이라고도 하는 급한 노래이다. 이 곳의 「뱃노래」는 배를 저어 나갈 때와 고기 잡을 때, 귀항할 때, 각각 그 노동 형식에 따라 여음이 달라진다. 「등짐소리」는 “오오 허오/바늘같은 몸으다가/황소같은 짐을 싣고서/우리가 이 고개를/어이 넘어 갈꺼나/오오 허오…….”처럼 한다.
「화투노래」는 “섬겨보세 섬겨를보세/화투 한목을 섬겨보세/정월부터 속썩은 마음/이월매주에 맺어놓고/삼월살구 산란한 마음/사월흑사리 흘러간다/오월난초 나는나비…….”처럼 각 달을 가리키는 화투의 그림과 그 이름에 관련하여 개인의 서정을 나타낸다.
이 밖에도 이 지방에는 불행한 여인의 일생을 노래한 「꼬댁각시노래」와 노동요인 「콩밭노래」 · 「청춘가」 · 「한탄가」 · 「이별가」 · 「시집살이노래」 등 다양한 노래들이 전승되고 있다.
금강과 만경강의 하구에 위치하여 인접한 익산시 · 김제시와 함께 호남평야의 중심을 이루어 일찍부터 미곡농업이 발달하였다. 대부분 지역이 충적평야로 서부해안지역과 남부지역은 옥봉(玉峰) · 수산이곡(壽山耳谷) · 임옥(臨玉) 등 넓은 평야가 분포하고 있으며, 이들 지역에는 옥구 · 군산 · 미제 등의 저수지가 있어 농경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2008년 현재 경지면적이 1만 4,515㏊로 경지율이 39.1%에 달하는 평야지역이지만 농가인구는 2만 2,018명으로 시 전체인구의 약 9.3%에 불과하다. 논이 1만 3,437㏊로 시 전체 경지면적의 91.8%를 차지하며 벼농사 중심의 주곡농업이 이루어진다. 군산항은 일제강점기 때 호남평야의 미곡수출항으로 크게 성장했다. 근교지역인 개정 · 구암 등지에서는 근교농업으로 배추 · 상추 · 토마토 등의 채소류 재배가 활발하다.
긴 해안선과 많은 도서가 있어 부안군과 함께 전라북도 서해안 어업의 중심지이다. 군산내항을 어업전진기지로 고군산군도 · 동지나해 등으로 출어하며, 주요 어종은 갈치 · 홍어 · 가자미 · 대하 · 게 등이다. 해안과 도서 지방에서 바지락 등 조개류와 미역 · 김 등 해조류의 양식도 활발하다. 옥구읍 · 회현면 등지의 만경강 하구의 해안에서는 간석지를 간척하여 조성한 천일염전이 많으나 생산은 부진하다.
일제강점기에 미곡 수출항으로서 정미업과 양조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이 발달하면서부터 전라북도 제1의 상공업도시가 되었다. 광복 후에는 군산항을 통해서 수입한 원목을 가공하는 (주)세풍 · (주)백화 등 제재 · 제지 · 합판산업과 양조 · 수산물가공업 등이 발달하였으나 1980년에 군산공업단지가 조성되기 전까지는 본격적인 공업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군산공업단지는 소룡동 일대의 간석지를 매립하여 조성한 것으로 1989년에 완공되었다. 또한 1994년에는 군산공업단지 서쪽의 간석지를 매립하여 군산국가산업단지를 조성했고, 여기에 대우자동차 공장이 입주하여 대규모 자동차 생산단지를 조성하고 있어 지역경제에 이바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성산면 · 서수면 · 옥구읍에 각각 성산 · 서수 · 옥구 등의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가동 중에 있다.
현재 금강 하구의 넓은 간석지를 매립하는 군장국가공단 조성사업 1단계 공사가 1997년에 완공되었고, 2021년까지 전체공정이 완료될 예정이며, 만경강하구의 간석지를 매립 · 개발하는 새만금지구 종합개발사업이 진행 중으로, 서해안시대의 전개와 함께 공업발전이 크게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공단조성 이전부터 조촌동 · 경암동 지역은 공업지구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해신동 · 소룡동 일대에는 소규모 조선업체들이 집중되었다. 일찍부터 발전한 제지 · 합판 · 양조 · 수산물가공업과 함께 기계 · 화학 · 유리 · 자동차 업종의 발전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조선 전기부터 조운 · 조창의 중심지였으나 본격적인 상업 기능은 조선 후기에 금강 수운을 이용한 교역이 활기를 띠면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개항 이전의 상업활동은 경포시장과 경장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군산부(群山府) 밖 경포리에 있던 경포장은 전군가도(전주∼군산)에 연하여 있고, 수로가 흐르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일대의 산물이 거래되었다.
미면 경장리(지금의 경장동)에 있던 경장장은 경포천을 거쳐 금강과 통하였으므로, 수운을 이용하여 상류 지방의 상품과 하류 지방의 산물이 거래되었다. 장날은 음력 10일이며 거래품은 쌀 · 콩 · 노두 · 면화 · 깨 · 마포 · 어패류 · 건어물 등이었고, 특히 미면에서 생산되는 백염(白鹽)이 거래되었는데, 철도교통의 발달로 금강 수운이 쇠퇴함에 따라 쇠퇴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군산부두의 장미동을 중심으로 쌀 무역이 성했고, 장재동에 상설시장인 군산시장이 세워졌다.
현재는 구시장으로 불리는 신영동의 군산공설시장 및 명산 · 동부 · 동산 등의 4개 상설시장과, 정기시장으로 1·6일에 개장되는 대야면의 대야장이 있다. 임피면의 임피장은 익산시에 기능이 흡수되어 지금은 열리지 않는다.
군산항은 1899년 개항된 이후 일제강점기에 호남지방의 쌀 무역항으로 성장하여 일찍부터 해운교통과 육상교통이 발달했다. 그러나 광복 후 중국과의 무역 단절, 배후지의 경제적 취약성, 항만 조건의 불리 등으로 인해 그 기능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 익산공단 · 전주공단 · 군산임해공단의 원료와 상품의 수출입을 위하여 1980년에 군산외항이 건설되면서 점차 기능이 회복되고 있다. 최근에는 전라북도 유일의 공항이 개설되어 교통의 중심지 구실을 하고 있다.
육상교통의 경우 1907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적 도로인 신작로(新作路)가 전주∼군산간에 1등도로로 건설되었고, 1913년에 군산선철도가 가설되었으며, 1990년에는 금강하구둑의 완공으로 충청남도 서천군과 도로가 연결되어 매우 편리하다.
해운교통은 광복 이후의 한동안의 침체기를 벗어나 다시 항만 기능이 활발해지면서 1980년에 국제화물운송을 담당하는 군산신항을 소룡동에 건설하고, 기존의 장미동 내항은 연안해운을 담당하게 되었다. 내항에서는 선유도 · 장자도 등의 고군산군도와 비안도 · 장항과의 항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1996년부터는 중국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옌타이[煙台]와의 정기 직항로가 개설되었다.
항공교통은 군산비행장이 개설되어 제주에 취항하고 있으며, 현재 군장신항만과 서해안고속도로가 건설되어 있다.
군산은 금강과 황해가 만나는 항만으로, 하구를 둘러싸고 있는 월명공원은 바다와 금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다. 금강하구를 막아 건설한 금강하구언과 금강호는 새로운 관광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금강호에서의 가물치를 중심으로 하는 민물어종의 어로작업 장면과 하구언에 설치된 어로(魚路)를 타고 금강호 쪽으로 올라가는 물고기의 이동은 일품이다. 하구언 주변에는 각종 숙박시설과 음식점들이 밀집해 있다. 서해안고속도로의 완공 이후에는 금강하구언 유원지, 한산, 부여의 백제문화권, 대천해수욕장을 연결하는 연계관광지가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주위의 수목과 황해를 조망할 수 있는 월명공원의 수시탑에서 내려다보는 군산항의 경관은 한 폭의 그림이다. 전군가도(번영로)를 따라 벚꽃백리길이 군산에 이르러 월명공원의 벚꽃과 어울려 절정을 이룬다. 수시탑에서 바라보는 황해의 낙조 또한 장관이다. 또한 수시탑에서는 황해와 군산시가지,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넓은 평야를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다.
공원 주변 부두에는 대규모 생선횟집들이 들어서 있어 벚꽃이 피는 계절에는 경향에서 많은 관광객이 모여든다. 월명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황해를 끼고 경관을 감상하면서 수원지와 은적사에 이르는 오솔길은 일품이고 곳곳에 시민휴식처가 설치되어 있다.
예로부터 군산 주변의 경치 좋은 곳을 군산팔경이라 일컬어 왔다. 금강 쪽에서 죽성 동쪽으로 밀려오는 봄기운을 표현한 죽성춘하(竹城春霞), 금강을 내려오는 돛단배를 노래한 궁포귀범(弓浦歸帆), 공원에서 저녁에 비 내리는 강 건너 장항을 보는 용당야우(龍塘夜雨), 장항 쪽 황해로 저물어가는 낙조를 노래한 장암낙조(長巖落照), 해망동 일대 소나무밭에 걸린 가을밤의 달을 노래한 해망추월(海望秋月), 군산공원 끝 바위에서 고기를 낚는 흑기조어(黑璣釣魚), 오성산 기슭으로 나는 기러기 떼를 노래한 서포낙안(西浦落雁), 천방산봉수대에 흩날리는 저녁 눈발을 노래한 봉산모설(烽山暮雪)은 오늘날에도 그 정취를 맛볼 수 있다.
선유도 · 장자도 · 신시도 등의 여러 섬이 모인 고군산군도의 해수욕장과 해안절벽은 유명하고, 옥구 · 회현 · 장상 저수지 등은 낚시터로 유명하다.
시의 서부에 위치한 읍. 면적 38.13㎢, 인구 3,541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선제리이다. 본래 옥구군 지역으로 정지산이 있어 정지산면(定之山面)이라 했고, 1910년에 군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면 · 서면 · 장면 · 박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옥구군의 읍내가 되어 구읍면이라 하다가 1931년 옥구면으로 개칭되었다. 1980년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5년 옥구읍 서부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89년 옥서면으로 되었다가 1995년 군산시에 속하게 되었다.
읍의 중앙에 영병산이 있고 주변에 50m 내외의 구릉지가 있을 뿐 대부분이 해안간척지로 구성되어 있다. 수산이곡평야 · 옥봉평야 · 선제평야가 전개되고 있는데 이들 평야는 만경강과 금강하구에 발달한 간석지로 간척사업 이전에는 황무지였다. 1920년대에 간척사업이 진행되고 1923년에 양수저수지인 옥구저수지가 축조되어 이들 간석지는 미곡생산지로 변모하였다.
만경강하구에는 옥구염전과 한국염전이 있었으나 앞으로 국제적 규모의 자동차경주장이 들어설 예정이다. 어은리를 중심으로 어업과 수산양식업이 성하나 새만금개발사업구역에 포함되어 있어 앞으로는 육지화될 것으로 보인다.
교통은 회현 · 옥산 · 군산 등지로 통하는 도로가 개설되어 편리하다. 군산에서 서울 · 제주 등지로 취항하는 군산비행장이 있다. 문화유적은 상평리에 옥신서원 · 옥구읍성지 · 옥구향교가 있는데, 향교 안에는 최치원(崔致遠)이 유년 시절에 독서를 했다는 자천대(紫泉臺)가 있고 향교 앞에는 20여 기의 선덕비가 있다. 어은리영병산에는 사자암봉수대, 수산리에는 테밋산산성지가 있다.
선제(船堤) · 옥정(玉井) · 상평(上坪) · 이곡(耳谷) · 수산(壽山) · 오곡(五谷) · 어은(漁隱) 등 7개 리가 있다.
시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16.80㎢, 인구 3,56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발산리이다. 본래 임피군 지역으로 임피읍의 서쪽이 되므로 서사면(西四面)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서삼면(西三面) · 북일면(北一面) · 남삼면(南三面) 일부와 군산부의 박면과 북면 일부를 병합하여 개정면이라 개칭하고 옥구군에 속해 오다가, 1995년 군산시에 속하게 되었다.
동북부의 고봉산 일대의 산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충적평야로 되어 있다. 교통은 간선수로가 면의 중앙을 관통하고 이에 병행하여 장항선과 4차선의 국도가 달리고 있어 편리하다. 시역의 확장으로 대단위 아파트 단지와 체육시설들이 잠식해 들어오고 있다.
문화유적은 발산리에 석등과 오층석탑 · 최호장군유지, 아산리에 산앙사와 낙영당, 통사리에 20여 기의 석곽묘군(石槨墓群)이 있다. 발산(鉢山) · 아동(阿東) · 운회(雲會) · 아산(峨山) · 통사(通使) · 옥석(玉石) 등 6개 리가 있다.
시의 북부 금강변에 위치한 면. 면적 31.08㎢, 인구 2,53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옥곤리이다. 본래 임피군 지역으로 임피읍의 북쪽이 되므로 북삼면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하북면(下北面)과 상북면(上北面) 일부를 병합하여 나포면으로 개칭, 옥구군에 속해 오다가 1995년 군산시에 속하게 되었다.
면의 동부는 불지산 · 망해산 · 취성산 · 용천산 등 산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부의 금강호 연안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하여 있다. 쌀 · 보리를 생산하는 농업이 주산업이고, 최근에는 젖소사육 · 실뱀장어양식이 성하다. 주곡리에서는 왕골을 재배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한 숫골돗자리를 생산한다.
금강변을 따라 성산∼용안간의 지방도가 있을 뿐이어서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장상리에 어래산성지와 도청산성지 · 불지사, 옥곤리에 불지산봉수대지와 9기의 비석군이 있다. 옥곤(玉昆) · 나포(羅浦) · 장상(將相) · 부곡(富谷) · 주곡(酒谷) · 서포(西浦) 등 6개 리가 있다.
시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37.84㎢, 인구 5,64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지경리이다. 본래 임피군 지역으로 임피읍의 남쪽이 되므로 남삼면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이면(南二面) · 남사면(南四面) · 서삼면(西三面)과 상북면의 일부, 익산군 남이면과 서일면(西一面) 일부를 병합하여 큰 들판지대가 된다고 하여 대야면으로 개칭하고 옥구군에 속해 오다가 1995년 군산시에 속하게 되었다.
면의 북부에 대초산(大草山)을 비롯하여 100m 내외의 산지가 있을 뿐 대부분 지역이 만경강유역의 넓은 충적평야로 되어 있다. 옛날에는 배달뫼라 하여 만경강변의 거주지한계에 이르러 흔히 지경(地境)이라고도 불리운다. 현재 이 충적평야는 만경강변에 인공제방이 설치된 후 개간되어 왕산들 · 대야들을 이룸으로써 중요한 미작지대가 되었다.
탑천이 동부를 남북으로 지나 만경강에 흘러드는데 이는 제수문을 통하여 통제되기 때문에 관개용수 공급에도 이용되고 있다. 간선수로가 면 중앙을 관통하고 있어 관개용수의 공급이 원활하여 농경에 편리하며, 경지정리가 잘 되어 있다. 벼농사 중심의 주곡농업 위주이며, 최근에는 근교농업의 일환으로 채소재배가 성하고 양계 · 양돈 · 비육우 사육이 활발하다.
교통은 전주와 김제간의 국도가 면의 중앙을 통과하고 장항선이 지나 매우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죽산리에 탑동삼층석탑, 복교리에 비석이 있다. 산월(山月) · 보덕(寶德) · 지경(地境) · 복교(福橋) · 광교(光橋) · 접산(蝶山) · 죽산(竹山) 등 7개 리가 있다.
시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24.23㎢, 인구 2,86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서수리이다. 본래 임피군 지역으로 임피읍의 동쪽이므로 동이면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일면(東一面)과 남일면(南一面) 일부, 함열군 남이면 · 동이면 일부, 익산군 북일면 일부를 병합하여 서수면으로 개칭하고 옥구군에 속해 오다가 1995년 군산시에 속하게 되었다.
북서부는 200m 내외의 산지이며 남동부는 충적평야지대이다. 동부와 남부 경계를 따라서 탑천과 그 지류가 흘러가고 있다. 쌀 · 보리 생산이 주업이고, 양잠과 축산업 · 관상수재배 · 채소재배 등이 행해지고 있다.
교통은 익산간의 국도와 대야∼익산 용안, 군산∼임피∼익산, 황등∼익산 웅포간의 도로가 개설되어 편리하다. 교육 · 문화 · 상업 기능을 거의 익산시에 의존하고 있어 시의 근교지대에 해당한다.
문화유적은 관원리에 관원산성지, 취동리에 상주사 · 보천사가 있고, 조선시대의 와요지(瓦窯址)와 사기요지(沙器窯址)가 있다. 서수(瑞穗) · 취동(鷲東) · 관원(官元) · 마룡(馬龍) · 화등(禾登) · 금암(琴巖) 등 6개 리가 있다.
시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27.41㎢, 인구 3,28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고봉리이다. 본래 임피군 지역으로 임피읍의 북쪽이 되므로 북일면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북면과 남삼면 일부를 병합하여 오성산의 이름을 따 성산면으로 개칭하여 옥구군에 속해 오다가 1995년 군산시에 속하게 되었다.
면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오성산 · 대명산 · 망경산 · 고봉산 등 산지가 형성되어 있고 그 주변에 둔덕들 · 수림평야 등이 분포하고 있다. 쌀 · 쌀보리 등 주곡작물 생산이 주를 이루며, 젖소사육이 활발하고 특산물인 돗자리를 생산하고 있다. 성산농공단지가 있어 농가 유휴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공산품 생산도 이루어지고 있다.
교통은 군산 · 임피 · 익산을 연결하는 국도와 나포∼익산 웅포를 연결하는 지방도가 개설되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도암리에 오성산봉수대지 · 지석묘군, 여방리에 일광사(日光寺)와 지석묘군 · 석실고분, 창오리에 창안토성지(倉雁土城址)와 창안석불, 산곡리에 옹기요지, 성덕리에 고사지(古寺址)가 있다. 창오리의 다리실재 부근은 조선시대까지 금강 조운의 중심지였다.
고봉(高峰) · 성덕(聖德) · 둔덕(屯德) · 도암(桃巖) · 여방(余方) · 대명(大明) · 산곡(山谷) · 창오(倉梧) 등 8개 리가 있다.
시의 서부 황해에 면한 면. 면적 23.56㎢, 인구 4,081명(2015년 현재). 면사무소는 해신동에 있다. 1906년전라도 지도군(智島郡)으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충청남도 서천군에 속하였던 개야도 · 죽도 · 어청도를 흡수하여 전라북도 옥구군 미면에 속하였다. 1980년 미면이 미성읍으로 승격, 1986년 미성읍에서 분리되어 옥도면으로 되었다.
신시도리에 대각산, 비안도리에 노기봉이 있고, 고군산군도를 비롯하여 유인도 16개, 무인도 47개의 도서로 구성되어 있다. 충청남도 서천군에 속한 섬들을 제외한 야미도 · 신시도 · 무녀도 · 대장도 · 장자도 · 관리도 등이 있다. 주민의 대부분이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농경지가 적어 군산으로부터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조달받고 있다. 주로 멸치 · 바지락 · 김 등이 어획, 채취되고 있다.
교통은 군산과 충청남도 대천에서 연락선이 운행되어 육지와 연결된다. 선유도리에는 백사장 · 기암절벽 · 해송 등이 잘 조화된 선유도해수욕장이 있으며, 근년에는 대장도 · 장자도 · 선유도를 잇는 현수교가 가설되어 그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개야도(開也島) · 연도(煙島) · 어청도(於靑島) · 무녀도(巫女島) · 말도(末島) · 야미도(夜味島) · 장자도(壯子島) · 선유도(仙遊島) · 관리도(串里島) · 신시도(新侍島) · 비안도(飛雁島) 등 11개 리가 있다.
시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16.73㎢, 인구 3,45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옥산리이다. 본래 옥구군 지역으로 박지산의 이름을 따서 박지산면, 또는 줄여서 박면이라고 하다가 1910년에 군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면과 임피군 서삼면, 서사면 일부를 병합하여 옥산의 이름을 따서 옥산면으로 개칭하고 옥구군에 속해 오다가 1995년 군산시에 속하게 되었다.
면의 남서부에 옥산 · 금성산, 남동부에 대봉산을 비롯한 100m 내외의 구릉지가 있고 그 주변에 평사들 · 석교들 등의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다. 농업은 논농사 중심으로, 주산물로 쌀 · 쌀보리 등을 생산하며, 근래에는 군산시의 근교농업지대로 발전하고 있다.
교통은 군산∼옥구간의 지방도, 그 외 군도가 면의 서부를 통과하여 편리하다. 옥구선철도는 폐쇄되었다. 군산시의 교외권에 들어 군산시의 생활권에 속한다. 문화유적은 당북리에 염의서원, 금성리에 박지산성지가 있다. 옥산(玉山) · 남내(南內) · 금성(錦城) · 쌍봉(雙鳳) · 당북(堂北) 등 5개 리가 있다.
옥구반도의 서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20.88㎢, 인구 4,00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옥봉리이다. 1985년 옥구읍 서부출장소가 개설되었다가 1989년 옥서면으로 승격되었다.
면의 남단에 화산(華山, 51m), 북단에 옥녀봉(玉女峰, 87m)이 있다. 면의 대부분이 옥봉평야에 속하므로 면적의 48.2%가 논이고, 해안을 따라 8.5%의 전작지대가 있으며 나머지는 임야로 되어 있다.
면의 북쪽에 있는 양수저수지인 옥구저수지에서 관개용수가 공급되어 97. 5%가 수리안전답이다. 옥구저수지는 간선수로로 공급되어온 물을 농한기 동안에 기계양수하여 저수했다가 농번기에 주변 몽리구역에 물을 공급한다. 농업은 미작농업 위주이고 근년에는 비닐하우스를 이용하여 소채류의 생산도 활발하다.
면의 서남단에 위치한 하제는 어항으로 이를 중심으로 한 인근 해안에서 노랑조개와 기타 패류의 어획고가 많다. 면의 남부 만경강 연안 쪽에 옥구염전과 한국염전 580ha가 있어 천일제염으로 소금을 생산하여 많은 수익을 올렸으나 중국산 소금의 유입으로 채산성을 잃어 폐염전이 되었다가 2007년 대규모 골프장으로 바뀌었다. 또한 해안에 김양식장이 개발되어 김양식이 성하다.
도로는 옥구∼시내를 연결하는 지방도가 면의 중앙을 동서로 관통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선연리의 화산봉수대지, 오봉리의 봉수대지 · 성산토성지가 있다. 옥봉(玉峰) · 선연(仙緣) 등 2개 리가 있다.
시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21.97㎢, 인구 3,12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읍내리이다. 본래 임피군 지역으로 임피읍이 있던 곳이어서 현내면(縣內面)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일면 · 남이면 · 동이면, 익산군 서일면 일부를 병합하여 임피면으로 개칭, 옥구군에 속했다가 1995년 군산시에 속하게 되었다.
북서부에 용천산 · 남산 · 봉황산 등 구릉성 산지가 발달하고, 면의 동부를 탑천이 흘러 유역에 충적평야가 발달하고 있다. 산업구조는 농업 위주로, 쌀 · 보리 등 주곡작물을 생산하고 있다. 근년에는 땅콩재배와 화훼농업도 성하다.
교통은 군산 · 성산 · 익산 · 전주를 잇는 국도가 면의 북부를 통과하고, 대야∼용안간의 지방도가 서부를 지나며, 장항선철도가 남부를 지나고 있어 편리하다. 익산시와 근접하여 익산시의 생활권에 들어간다.
문화유적은 읍내리에 임피읍성지, 임피향교, 미원리에 봉암서원지, 취산리에는 용천산성지와 예산석불(芮山石佛)이 있다. 읍내(邑內) · 취산(鷲山) · 미원(米院) · 보석(寶石) · 술산(戌山) · 월하(月下) · 영창(永昌) 등 7개 리가 있다.
시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38.34㎢, 인구 3,73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정리이다. 본래 옥구군 지역으로 장제면(長梯面)이라 하다가 1910년에 군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풍면(風面)과 정지산면, 박지산면 일부, 임피군 서삼면, 남사면 일부를 병합하여 옛 회미현의 이름을 따 회현면이라 개칭하고 옥구군에 속했다가 1995년 군산시에 속하게 되었다.
북부에 청암산을 비롯한 1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발달하고, 남부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이 평야는 본래 만경강유역의 간석지로 미개간의 황무지였으나 1920년대 이후 만경강 하천개수공사로 인공제방이 축조되면서 대규모 간척사업에 의해 개간된 땅이다. 벼농사 중심의 주곡농업이 주산업이다.
교통은 옥구∼시내간의 지방도가 북부를 통과하고, 대야와 연결되는 지방도가 동부를 지나 편하다. 시와 인접하여 생활권은 거의 군산에 속한다. 문화유적은 대정리에 회미현성지, 고사리에 옹기요지가 있다. 대정(大政) · 월연(月淵) · 금광(金光) · 고사(古寺) · 세장(細長) · 학당(學堂) · 원우(院遇) · 증석(曾石) 등 8개 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