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정(子貞), 호는 남곡(南谷)·근리재(近裏齋) 또는 남곡둔옹(南谷遯翁). 아버지는 증좌승지 권찬(權瓚)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이겸익(李謙益)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9세 때 『주자원유편(朱子遠遊篇)』에 차운(次韻)을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등 약관에 벌써 그 재명이 서울에까지 퍼져 정태화(鄭泰和)가 옥당에 있을 때 포의(布衣)로 교우를 허락하고, 한나라 가의(賈誼)와 당나라 왕발(王勃)에 비유하였다.
1635년(인조 13) 사마시에 합격해 1636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가를 수행해 남한산성에 들어갔는데, 전세가 점차 급박해지자 최명길(崔鳴吉) 등이 화의를 주장함을 보고 그에 격분해 그들을 참해 대의를 고수할 것을 상소했으나 정원(政院)에서 반려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가 반려된 상소문을 안고 통곡하면서 나오자 정온(鄭蘊)이 그 글을 보고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이는 이 사람뿐이다.”라고 탄식해 말하였다. 굴욕적인 화의가 성립되고 마침내 성문이 열리자, 그는 바로 낙향해 자식들에게 과거를 보지말고 농사를 지으라고 권하였다.
그 뒤 세속과는 인연을 끊고 오직 학문에 전념해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읽어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닦았다. 그의 고고한 학문을 알아주는 이는 별로 없었으나 이휘일(李徽逸)이 알고 서로 심교를 맺어 오래도록 학문을 강마(講磨)하였다.
1661년(현종 2) 감사의 추천으로 남별전참봉(南別殿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도중 광릉 부근에서 멀리 삼전도비(三田渡碑)를 바라보고 비분을 참지 못해 집으로 되돌아가서 스스로 ‘남곡둔옹’이라 자호하고 두문불출, 오직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정주학에 관한 연구 저술이 1천여 편에 달하였다.1817년(순조 17)에 이조참의의 진정으로 정경대부(正卿大夫)에 추증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남곡문집(南谷文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