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명세(命世), 호는 노헌(魯軒). 아버지는 참봉 권사의(權士毅)이며, 어머니는 광릉안씨(廣陵安氏)로 안윤조(安胤祖)의 딸이다. 밀양에서 출생했으며,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약관의 나이로 당숙인 권사악(權士諤)과 작은아버지 권사민(權士敏)과 함께 인근 주민과 노복들로 의병을 조직해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들어가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160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 음보(蔭補)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그 뒤 봉사(奉事)와 직장(直長)을 역임한 뒤, 1616년 평구도찰방(平丘道察訪)이 되었다가, 광해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학문연구와 저술에 힘썼다.
1623년 인조반정 뒤 다시 기용되어 북부주부(北部主簿)가 되었고, 얼마 후 진천현감으로 전임되었는데, 재임 기간에 선치와 교화에 힘쓴 공로로 인조가 『동의보감』 한 질을 하사하였다.
원래 관직에 뜻이 없어 벼슬을 사양하고, 옛 집인 밀양에 돌아가서 손기양(孫起陽)과 도의교(道義交)를 맺고 학문을 강론해 지방 선비들이 종장(宗匠)으로 추앙하였다. 그 뒤 고향인 경주로 가서 학문에 더욱 정진하였다.
밀양과 경주에서 『여씨향약』을 본떠서 실정에 맞는 향약을 만들어 풍속 순화에 힘썼다. 만년에는 형강(兄江)에 정자를 짓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의 저서는 안동권씨의 세고인 『두고세고(杜皐世稿)』에 합편되어 있다. 또한 진천현감으로 있을 때, 광해군의 폭정과 역륜을 탄핵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 동기가 되었던 당시 상소문 유초(遺草)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