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나무·뼈 등을 주요 재료로 사용하던 신석기시대에 이어 구리[銅]가 인류 최초의 금속으로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금속공예는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시기는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지만 북이라크에서는 적어도 서기전 5500∼4500년에 순동(純銅)의 제련이 행해졌다고 하며,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는 서기전 3700년 무렵에 만든 순동에 약 10%의 주석을 섞은 청동제품이 출토되고 있다.
동양에서는 서기전 2500년 무렵 인더스문화기부터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황하 유역에서는 서기전 2000년 무렵에 청동기가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는 충청남도 부여군 송국리와 평안남도 평양 부근에서 요령식동검(遼寧式銅劍)이 출토됨으로써 청동기문화의 시작이 서기전 수세기까지 올라간다고 보고 있다. 청동기에 이어 사용된 금속은 철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청동기문화에 이어 철기문화가 일어나 철로 만든 여러 가지 도구가 사용되었다. 그 뒤 여러 가지 금속을 사용하여 각종 도구를 제작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4, 5세기 무렵에는 여러 가지 금속을 구사하기에 이르렀다.
인류가 사용한 금속에는 금·은·동·철·유(鍮) 등이 있다. 금은 일찍부터 사용되어 이집트 제18왕조의 왕묘에서는 막대한 양의 금제 부장품이 발견되었고, 그리스·로마시대에는 금화가 제작되었다. 동양에서는 중국 은허(殷墟) 샤오툰촌(小屯村)에서 금괴가 발견된 일이 있으나, 전국시대에 이르러 본격화하여 금제대구(金製帶鉤)가 제작되었고 금상감(金象嵌)·금도금(金鍍金) 등의 기술이 발달하였다.
한(漢)나라 때에는 금립세공(金粒細工)이 발달하였는데, 평양 석암리(石巖里) 제9호분 낙랑묘에서 출토된 금제대구는 그 좋은 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4세기 무렵에는 관·귀고리·과대(銙帶)·요패(腰佩) 등의 금제품이 유행하였다.
은(銀)은 정련이 어려운 탓인지 금보다는 일반화되지 못하였으나, 메소포타미아의 라가시유적(Lagash遺蹟)에서 출토된 엔테메나의 은호(銀壺, 서기전 2650년)는 완전하며, 입가에 엔테메나왕의 문자가 새겨 있는 최고의 예이다.
중국에서는 뤄양·진춘, 동주(東周)시대의 한군묘(韓君墓) 출토 은이배(銀耳杯)·은인(銀人) 등이 있다. 한나라 때의 유품은 많지 않으나 당나라 때가 되면 다시 널리 유행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고분에서 대량의 금·은제 부장품이 출토되고 있다.
청동은 금속문화에서 가장 광범하게 사용되던 재료로서, 무기·제기·일상용품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생활과 관련되는 모든 분야의 도구를 제작, 사용하였다. 『주례(周禮)』의 「고공기(考工記)」에는 ‘육제(六齊)’라 하여 주석의 배합률에 따라 여섯 가지 구분을 두었는데, 이는 결국 동의 경도의 차이를 말하는 것으로, 그 배합이 각각 반이 되면 색조가 희어져 흔히 백동(白銅)이라고 부른다.
특히, 청동기 위에 금을 입히는 기술이 발달하여 이른바 금동제품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불상은 거의 모두 금동제이며 삼국시대 고분에서는 많은 금동제품이 발견된다.
청동 다음에 사용된 철은 인류문화에 많은 진전을 가져왔지만 공예품에는 그다지 많이 이용되지는 않았고, 주로 무기로서 이용되어 서기전 3000년 무렵에는 연철(鍊鐵)로 제작된 단검신(短劍身)이 중동지방에서 출토되었다.
중국에서도 물론 철로 무기·농기구들을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이밖에 고려시대 이후에는 동에 아연 30%를 섞은 진유(眞鍮), 즉 놋쇠가 사용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귀금속을 제외한 공예품에는 거의 놋쇠를 사용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금속으로 도구를 제작하기 시작한 시기는 청동기시대부터이다. 석기문화의 사회에 언제, 어떠한 경로를 밟아서 청동기문화가 전래되었는지는 아직까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동검(銅劍)의 출토 지점과 양식, 또는 동검을 주조하던 거푸집의 출토지 등을 종합해 볼 때 아마도 북방경로를 통하여 서기전 1000년 무렵에 전래된 것으로 보이며 서기전 700년 무렵부터는 실제로 제작, 사용하였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곧이어 철기문화가 들어와 주로 철로써 각종 이기(利器)·농기구 등을 생산하였는데, 당시 철을 제련하여 도구를 만들던 야철지(冶鐵址)가 간혹 발견되고 있다. 한편, 금의 사용은 청동과 비교하여 볼 때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청동기보다는 늦으며, 금을 사용하면서부터 청동에 도금하는 기술이 발달하여 금동제품이 제작되었다.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을 통하여 볼 때 금속기 제작기술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방법으로 분류된다. 첫째, 용해된 액체를 일정한 틀에 부은 다음 식혀서 도구를 만드는 주조법이다. 동종(銅鐘)·경감(鏡鑑)을 비롯하여 초두(鐎斗)·철부(鐵釜)·동호(銅壺)·동합(銅盒) 등의 용기들은 대개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둘째는 단조법(鍛造法)으로, 열을 가하여 부드럽게 된 금속을 두들겨 펴서 어떤 형태를 만들거나 얇은 금속판을 만든 다음 잘라내면서 형태를 만드는 방법이다. 금관총·금령총 등에서 발견된 금동합·금동고배(金銅高杯)·각배(角杯) 등은 이 방법으로 만든 것이며, 삼국시대 여러 고분에서 출토되는 관·과대·요패 등도 모두 이 방법에 의한 것이다.
셋째는, 표면에 장식문양을 시공하는 방법으로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오목새김[陰刻]한 선 또는 점으로 일정한 문양을 표현하는 방법이고, 문양 이외의 공간에 작은 원문(圓文)을 연속해서 찍는 것도 일종의 오목새김무늬라고 할 수 있다. 돋을새김[陽刻]은 문양이 조각된 틀에 대고 두들겨서 문양이 두드러지게 하는 방법으로 경주 식리총(飾履塚)출토 식리는 좋은 예이다.
이에 준하는 수법으로 삼국시대 장신구에서 자주 사용된 금립세공(filigree)이 있는데, 경주시 보문동 부부총에서 출토된 귀고리는 그 대표적 유물이다. 투조(透彫)는 표현하고자 하는 문양 이외의 부분을 오려내는 방법으로, 평안남도 중화군 진파리 제1호분 출토 투각금구(透刻金具)는 고구려의 유물로서 대표적인 작품이다.
다음은 입사수법(入絲手法)이다. 일본에 현존하는, 백제에서 보낸 철제 칠지도(七支刀)에 명문이 금입사되어 있음을 보면 삼국시대에 입사, 즉 상감수법(象嵌手法)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입사수법의 유품은 대부분 고려시대 이후의 작품들이고, 그 이전에는 금제품에 옥을 감장(嵌裝)하는 수법이 오히려 성행하여 그 수법의 작품이 상당수 발견되었다. 도금은 삼국시대 이래 성행하여 각종 금동제품들이 남아 있다.
문양의 종류는 각 시대의 사회환경이나 종교신앙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청동기시대의 샤머니즘의 문양,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동안의 불교적인 문양, 조선시대의 현세구복적(現世求福的)인 문양 등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청동기시대 의기(儀器)에 나타나는 점무늬·밀집선무늬·번개무늬·삼중격무늬[三重格文] 등은 다분히 주술적인 성격이 짙다.
불교 전래 이후에는 연꽃무늬가 압도적으로 성행하며, 용·봉황 등의 동물계 문양도 등장한다. 조선시대에는 길상(吉祥)의 의미가 담긴 ‘壽(수)’ 혹은 ‘福(복)’자를 도안화하고 박쥐모양을 즐겨 쓴다. 그밖에도 풍경 또는 고사(故事)를 도안화하기도 한다.
청동기시대 이래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금속공예품은 매우 다양하다. 이 다양성은 재료·기법·형태, 또는 문양의 배치 등 여러 방면에서 나타난다. 금속공예품은 대개 장신구·불구(佛具)·사리구(舍利具)·일상용구와 고고학적 유물 등 5개 항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인류는 일찍이 금속문화에 접하기 이전부터 몸을 치장하기 시작하였다. 금속문화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패각(貝殼) 같은 것이 장신구의 재료가 되기도 하였으나, 고분시대가 되면 금·은 등의 귀금속을 사용하여 각종 장신구를 제작하였고, 그 기술도 상당히 진전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금속제 장신구에는 관·귀고리·목걸이·팔찌·반지·과대·요패 등 몸을 치장하는 도구와 비녀·뒤꽂이·떨잠 등 머리를 장식하는 도구, 그리고 신·장도 등이 있다.
관(冠)은 고대에는 권위를 상징하는 것인 만큼 금·금동 등 귀금속으로 제작하였다.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되는 관은 대개 금제인데 삼국이 각기 특색있는 형태를 만들었다.
예컨대 평양 부근 출토의 투각초화문 금동관, 나주군 출토의 초화문 금동관 또는 무령왕릉 출토의 투각금제관식 등의 백제관, 출자형(出字形)과 녹각형(鹿角形) 입식(立飾)이 붙은 금관총·금령총·서봉총(瑞鳳塚)·천마총·황남대총(皇南大塚) 출토의 신라시대 금제관, 고령(高靈)출토의 가야시대 입화식(立花飾) 금제관 등이 있다.
표면에는 여러 개의 영락(瓔珞)과 비취색 곡옥(曲玉)을 달아서 한층 장식효과를 냈다. 특히 신라금관에는 화려한 수식(垂飾)이 달리며 서봉총 금관 위의 새모양이나, 금제 혹은 은제의 조형(鳥形) 또는 조익형금구(鳥翼形金具)는 고대 원시종교의 하나인 조류숭배사상에 의한 장송용구(葬送用具)로 해석된다. 삼국시대에 비하면 통일신라시대 이후는 출토된 예가 없으며, 문헌 또는 전세품(傳世品)을 통하여 짐작되는 고려·조선시대의 관은 금속만으로 제작한 것은 없다.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금·은·금동제의 귀고리는 거의 3백쌍으로 추산된다. 구조는 귀에 닿는 고리, 중간부, 그리고 수식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초기의 것은 중간부가 생략되기도 한다. 귀에 닿는 고리의 굵기에 따라 태환식(太環式)·세환식(細環式)의 구분이 있으며, 표면에 구슬을 박거나 금립세공을 한 호화스러운 것도 있다.
이와 같이 출토의 예가 많음에도 같은 것이 없음은 수공업으로 제작한 것임을 추측하게 한다. 고려·조선시대가 되면 귀고리는 쇠퇴한다.
목걸이에는 금이 많이 사용되며 때로는 구슬을 곁들여 사용한다. 경주 노서동고분과 천마총, 공주 무령왕릉 등에서 출토된 목걸이는 그 중에서도 호화로운 작품이며, 신라의 목걸이에는 끝에 곡옥을 다는 형식이 일반적이다. 목걸이 또한 고려·조선시대에는 쇠퇴한다. 팔찌도 금·은제가 다수 출토되는데, 표면에 돌기가 연속된 형식이 보편적이나 경주 황남대총 북분, 공주 무령왕릉 출토의 팔찌는 매우 화사한 작품이다.
특히, 무령왕비의 은제 용무늬팔찌 안쪽에는 ‘庚子年(경자년)’·‘多利作(다리작)’ 등의 명문이 있어 매우 주목되는 작품인데, 경자년은 520년(무령왕 20)에 해당되며 다리는 장인(匠人)의 이름이다.
반지는 삼국시대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남녀를 막론하고 손을 장식하는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특히, 삼국시대에 크게 유행하여 금·은·금동의 반지를 사용하였고, 한 사람의 무덤에서 수십 개의 반지가 발견되는 수도 있다. 손등으로 나오는 중간부를 약간 굵게 만든 것이 가장 보편적인 양식이며 여기에 여러 가지 장식이 가미된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옥을 사용하기도 하나 금은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과대는 과판(銙板)을 연결한 허리띠이며 끝에는 교구(鉸具)가 붙어 있다. 청동기시대의 교구는 대구(帶鉤)라 하여 모양에 따라 호형(虎形)·마형(馬形)의 구분이 있으며, 신라에서는 형태를 달리하여 금제의 호화스러운 작품을 만들었다. 요패(腰佩)는 과대에서 밑으로 늘어지는 수식을 말하는데, 크고작은 타원형 판을 연결한 끝에 여러 가지 형태의 물건을 단다. 금제·은제가 있으며, 경주 금관총 출토의 과대와 요패는 가장 찬란하다.
고려시대에도 금동제 과판을 연결한 과대를 사용하였으나, 투각수법은 없어졌다. 조선시대에는 금속과대는 없어지며, 그 대신 일부 금속을 사용한 노리개가 크게 유행한다.
머리를 장식하던 도구는 고대에서는 매우 드물어,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금제 뒤꽂이가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비녀·떨잠·뒤꽂이·족두리 등은 순수한 금속제는 아니지만 조선시대까지도 계속 제작되고 있다.
삼국시대 고분에서는 장송용으로 보이는 금동제 신이 발견된다. 표면에는 여러 가지 문양이 장식되고 바닥에는 수십 개의 송곳 같은 돌기가 있기도 하다. 경주 식리총 출토의 신은 표면 전면에 정교한 문양이 돋을새김되었고, 무령왕릉의 신에는 당초문(唐草文)이 투각되었다.
이상과 같은 장신구들을 통관하면 고대에는 금을 대량으로 사용하였음이 주목되며, 투각문양에 한층 효과를 내기 위하여 비단벌레껍질을 사용하였음은 특이한 수법이다.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불구가 금속공예 발달에 크게 한몫을 담당하였음은 오늘날 전해 오는 유품들을 통하여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불구 중에는 범종(梵鍾)·향완(香埦)·금고(金鼓)·정병(淨甁) 등 사찰에서 사용하던 것과 공예탑·경통(經筒)·요령(搖鈴) 같은 승려용 도구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범종은 가장 대표적인 불구로 통일신라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계속 주조되었고, 현존하는 예만도 350여 구에 달한다. 신라 경덕왕 13년(754)에 경주 황룡사에서 높이 1장 3촌, 두께 9촌, 무게 49만 7581근의 종을 제작하였다는 기록을 통하여 당시의 범종 주조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범종의 양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한국종’이라고 불리는 형식으로서, ① 용뉴(龍紐)는 한 마리의 용이 허리를 굽혀 고리가 되고, ② 용 옆에는 원통형 음관(音管)이 붙으며, ③ 종견(鐘肩)과 종구(鐘口)에 문양대가 있고, ④ 종견에 붙여서 대칭되는 네 곳에 문양대에 둘러싸인 방형 유곽(乳廓)이 있으며, ⑤ 한 유곽 안에는 9개씩 모두 36개의 유(乳)가 있고, ⑥ 종신(鐘身)의 넓은 공간에는 비천(飛天)과 당좌(撞座)가 대칭으로 배치되는 등의 특징이 있다.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은 725년(성덕왕 24)에 제작된 상원사(上院寺)의 동종과 771년(혜공왕 7)에 제작된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이다. 고려시대가 되면 종견에 입화장식(立花粧飾)이 붙고 음관 위에 구슬이 붙으며, 종구가 넓어지는 등의 변화가 생기지만 ‘한국종’의 기본형은 그대로 계승된다. 1058년(문종 12)에 제작된 동종, 1222년(고종 9)에 제작된 내소사동종 등은 그 대표작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① 용이 두 마리가 되고, ② 음관이 사라지며, ③ 유곽이 종견에서 떨어지고, ④ 종견과 종구의 문양대가 없어지며, ⑤ 종신에는 횡대(橫帶)가 생겨 장문의 명문이 양주(陽鑄)되는 등, 중국종의 영향을 받아 중국종과 유사한 형태의 범종이 제작된다. 1462년(세조 8)에 제작된 흥천사(興天寺)종, 1468년에 제작된 보신각(普信閣)종, 1469년(예종 1)에 제작된 봉선사(奉先寺)종 등이 대표작이다.
향로인 향완은 현재 고려시대 작품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금동향로는 둥근 노신(爐身)에 받침이 달리고 긴 손잡이 끝은 밑으로 꺾여서 사자가 앉아 있는 형태이지만, 고려시대가 되면 넓은 전이 붙은 바리 모양의 노신 밑을 나팔 모양의 받침이 받치고 있는 형식으로 변하게 된다. 또, 표면에는 연꽃잎·용·범자(梵字) 등 장식문양이나 명문까지 은입사되기도 한다. 지정(至正) 4년(1344)명 향로, 표충사향로 등은 그 대표작이다.
이 밖에도 기본형에 뚜껑을 덮고 발을 따로 단 안성 봉업사지(奉業寺址) 출토 향로, 중국 고동기(古銅器)의 방정(方鼎)을 모방한 형태의 향로, 밑에 짐승다리[獸脚]를 달고 뚜껑 중앙에 사자를 앉힌 형태의 향로 등 특이한 형태도 제작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고려시대 향로와 동일한 양식의 향로가 제작되는 한편, 전혀 형태를 달리하는 제례용 향로도 제작되었다.
금고는 금구(禁口) 혹은 반자(飯子, 半子)라고도 쓰는데 밖에서 쳐서 소리를 내는 도구이다. 형태는 한 쪽은 막히고 다른 한 쪽은 좁은 전만 남기고 속이 비어 있으며, 측면에 고리가 있어 매어달게 된 원반형으로, 표면을 동심원으로 구획한 다음 연화·당초·구름 등을 양주한 형식이 일반적이다. 현존하는 예로서는 함통(咸通) 6년(865년)명의 신라시대 금고 1점이 있으며, 고려 중기 이후의 작품은 많으나 조선시대가 되면 쇠퇴한다.
정병(淨甁)은 범어 쿤디카(Kundika)에서 온 말로서 보통 병보다 목이 길고 중간에 넓은 마디가 있으며 옆에 뚜껑이 있는 작은 주구(注口)가 붙은 형태의 병을 이르는 명칭이다. 고려시대에 유행하여 금속은 물론 토기 또는 청자나 백자로도 제작되었다.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청동은입사유로수금문정병(靑銅銀入絲柳蘆水禽文淨甁)은 가장 뛰어난 걸작이다. 굽과 목의 마디, 주구의 뚜껑 등은 은으로 만들었는데, 전면에 고운 녹이 고루 나서 입사된 문양의 은색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밖에 삼국시대 이래 동제 혹은 금동제의 공예탑이 제작되었다. 아마도 실내에 안치하였으리라고 생각되는데, 대개 1m 미만의 소형이지만 2m에 가까운 대형도 있으며, 목조건축의 세부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밖에 금동제 용두당간(龍頭幢竿), 송광사 소장의 금동요령, 운문사 소장의 동호(銅壺) 등은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끄는 작품들이다.
사리를 수장한 용기 또는 사리를 장엄하기 위한 물건들, 즉 사리를 외호(外護)하는 함(函) 또는 승려나 신도들이 시납하는 물건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물건들 중에는 금속제품이 많으며, 불교와 관계 있는 물품뿐 아니라 전혀 관계없는 여러 가지 물건들도 포함된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깊은 신앙에서 출발한 만큼 당대 공예기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삼국시대 이래 많은 탑에서 사리장엄구가 납치(納置)된 당시의 원형대로 발견되었다. 이 중 634년(선덕여왕 3)에 건립된 경주 분황사석탑(芬皇寺石塔)에서 발견된 장엄구 중에는 가위·금바늘·은바늘·침통(針筒) 등 여성용 물건들이 포함되어 있어 선덕여왕과의 연관을 연상하게 하며, 경주 감은사지동서삼층석탑(感恩寺址東西三層石塔)에서 발견된 사리구의 사천왕상이나 여러 주악상(奏樂像)들은 서방문화와의 접촉을 암시하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또한, 경주 구황동삼층석탑에서는 사리함에 새긴 장문의 명문으로 해서 탑의 건립이나 사리 납치의 연대가 밝혀졌으며, 금제불상 2구와 금제사리합을 비롯하여 금제합·은제합·금제고배 등이 발견되었다. 불국사삼층석탑에서는 당초문이 투각된 금동제사리외함 속에 은제사리함·금동사리함·동제비천·동경 등이 발견되었는데, 측천무후자(則天武后字)를 사용한 다라니경(陀羅尼經)이 있어 연대 추정에 도움이 되었다.
칠곡 송림사오층전탑(松林寺五層塼塔)에서는 전각형(殿閣形) 사리기와 함께 은제도금 수지형(樹枝形) 장식구, 금동원형금구 등이 발견되었다. 이 밖에 익산 왕궁리오층석탑에서는 금강경을 찍고 이것을 경첩으로 연결한 19매의 금제경판이 금제내함과 외함에 담긴 장엄구가 발견되었는데, 이제까지 발견된 장엄구 중에서 가장 호화로운 것이었으며 광주의 광주서오층석탑에서도 전각형 금동사리기가 발견되었다.
조선시대의 예로는 경기도 양주수종사(水鐘寺) 팔각오층석탑에서 발견된 18구의 금동불상과 동제 불감(佛龕)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밖에도 청동탑형사리기, 홍무(洪武) 24년(1392)명의 금강산 월출봉 출토의 사리기, 구미의 도리사부도(桃李寺浮屠) 발견 사리기 등이 있다.
일상용품은 종류가 더욱 많아 경감·기명·수저·촛대 등을 들 수 있다. 경감은 거울로서 동으로 만들면 동경, 철로 만들면 철경이라 하며, 중국의 경우 제작시기에 따라 한경(漢鏡)·당경(唐鏡)의 명칭으로 불린다. 우리 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에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이라는 정교한 동경이 제작되었으나,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걸쳐서는 발견된 예가 극히 드물다.
삼국시대의 예로는 공주 무령왕릉 출토의 수대경(獸帶鏡)·의자손수대경(宜子孫獸帶鏡)·방격규구신수문경(方格規矩神獸文鏡)과 경주 금령총 출토의 백유경(百乳鏡), 또는 진주·경주·양산 등지의 고분에서 출토된 방제경(倣製鏡)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예로는 당경의 영향을 받은 나전단화금수문경(螺鈿團花禽獸文鏡) 또는 불국사삼층석탑에서 발견된 파경(破鏡)이 알려져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고려시대가 되면 많은 작품들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 동경의 형태는 원형·5화(花)·6화·8화·12화 등의 화형경, 4릉(稜)·8릉·12릉·16릉 등의 능형경, 방형·우입방형(隅入方形)·장방형·팔각형 등의 각형경, 정형(鼎形)·병형(甁形)·종형·엽형(葉形)·운형(雲形) 등의 상형경(象形鏡) 또는 병경(柄鏡)·현경(懸鏡) 등의 특수형도 있다. 문양도 내행화문(內行花文)·서수문(瑞獸文)·유금문(乳禽文)·인물문·식물문·동물문·신선·불상·천인(天人)·고사(故事)·문자 등 실로 다양하다.
기명은 일상생활과 가장 긴밀한 관계가 있는 만큼 많은 종류가 제작되었는데, 금·은 등 귀금속을 사용한 예도 적지 않으며, 돋을새김·오목새김·상감 등 수법으로 장식한 것도 많다. 종류로는 합·발(鉢)·호(壺)·정(鼎)·반(盤)·배(杯)·주전자·탁잔(托盞)·초두(鐎斗) 등이 있다. 그중에서 경주 호우총(壺杆塚)에서 출토된 광개토왕을 기념한 고구려의 을묘년명 청동호·동제은입사봉황문합·은제주전자와 바리(미국 보스턴미술관 소장), 황남대총북분 출토 은잔, 무녕왕릉 출토 탁잔, 금관총 출토 초두 등은 주목되는 작품들이다.
수저는 삼국시대의 유물이 몇 점 발견되어 백제와 신라 수저의 형태가 알려졌다. 고려시대의 유물은 다수 출토되고 있으나 특별한 장식은 없고 현재까지의 변천과정을 알 수 있을 만큼 출토된 예가 풍부하지도 않다. 재료는 고려시대까지는 주로 청동을 사용하였으나 조선시대가 되면서 은과 놋쇠를 사용하였다.
촛대는 간단한 것에서부터 금동에 수정을 박은 호화로운 것이 있는가 하면, 쌍사자가 받치고 있는 특이한 의장으로 제작한 것도 있다. 조선시대가 되면서 등잔을 받치기 위한 여러 가지 형태의 촛대가 놋쇠로 제작되었다.
의기(儀器)·마구(馬具)·이기(利器)로 구분된다. 의기는 고대 의식에 사용되던 도구들로서 무구(巫具)로서의 성격이 농후한데, 대개 청동기시대 유물들로서 청동으로 제작되었다. 경주 출토의 쌍조간두식(雙鳥竿頭飾), 전라남도 화순 대곡리 출토 팔두령(八頭鈴), 대전 괴정동 출토 검파형동기(劍把形銅器)·농경문방패형동기(農耕文防牌形銅器), 출토지 미상의 간두식, 여러 곳에서 출토되는 쌍두령(雙頭鈴) 등은 의식에 사용하였던 도구들로 보이며, 표면의 장식문양이 매우 정교하다.
마구는 청동기시대 유물로서 몇 점의 거여구(車輿具)가 발견되었을 뿐 대부분 삼국시대 고분에서의 출토품들이다. 그 중에는 안교(鞍橋)·등자(鐙子)·행엽(杏葉)·운주(雲珠)·마탁(馬鐸) 등이 있고, 청동 혹은 금동제의 호사로운 것도 있다. 안교에는 전면에 당초문을 투각하였고, 경주 금관총 출토의 등자는 당초문을 투각하고 그 밑에 비단벌레껍질을 깔아서 색을 반사하게 한 것이 있으며, 행엽에도 그런 수법을 쓴 것이 있다. 이러한 마구의 착장(着裝) 방법은 경주 금령총 출토의 기마인물형토기에 잘 나타나 있다.
이기로는 동검(銅劍)·동모(銅鉾)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이다. 이들의 양식을 분류하여 청동기문화 전파의 경로를 추적하고 우리나라에서의 발달과정을 체계화할 수 있다. 이밖에 각종 검파 또는 검파두식이 발견되어 원시신앙의 한 면을 보여 준다.
이러한 의기·마구·이기들은 시대의 추이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 고대의 무속은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등장으로 양상을 달리하고, 여기에 사용되던 도구의 모습도 달라지게 되어 무구·마구도 큰 변화를 거치게 되었다.
조선시대 이후의 금속공예는 암흑기인 근대(1910∼1945), 서구적 경향의 현대(1945년 이후)로 그 맥이 이어지면서 현대 금속공예로서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근대미술의 흐름은 대체로 태동기(1910∼1919)·모색기(1920∼1935)·암흑기(1936∼1945)의 세 시기로 구분한다.
태동기는 서화협회전(書畫協會展)의 창립 등으로 우리의 근대미술이 태동하는 시기였고, 모색기는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를 중심으로 창작활동이 전개되었던 시기, 암흑기는 근대미술뿐 아니라 모든 문화가 암흑상태였던 시기이다.
근대공예는 개화기 이후의 새로운 서양식 공예와 전통공예가 공존하였던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전통공예를 다시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즉, 조선시대에는 관수용 공예품을 중앙의 경공장(京工匠)과 지방의 외공장(外工匠)이 맡아 제작하였는데, 한말의 혼란기에 관장(官匠)들이 자유인이 되어 각 지방으로 흩어져 지방 공예를 부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고, 관아의 제재에서 풀려난 외공장들로 개인 작업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한말 공부(工部)에서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를 설치(1899년, 상공학교는 1904년, 농상공학교는 1907년 공업전습소로 개편)하여 목공(木工)·염공(染工)·도공(陶工)·금공(金工)·응용과학 등 6개 과로 나누어 전승공예의 기능을 교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근대공예의 활동은 조선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참여하기 이전인 전기(1910∼1931)와 참여 이후인 후기(1932년 이후)로 나누어진다.
먼저, 전기에는 이왕가미술품제작소(李王家美術品製作所, 1922년 설립)와 일인상회(日人商會)가 흩어졌던 장인들을 모아 제작 활동을 하였던 때로, 전통공예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면서 자본주였던 일인들의 취향에 따라 전통공예가 일본화되었던 시기였다. 단지 있는 것을 향수할 뿐 공예 창조의 정신은 정지되었고 기술전통은 타락되었으며, 수요는 근대 기계제품으로 말미암아 급속히 줄어들었다.
공예품의 종류 또한 일본인들의 취향에 맞추어 나전칠기(螺鈿漆器)·도자기류가 거의 주종을 이루었을 뿐 금속공예는 이왕가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든 몇 점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들은 조각기법과 판금기법(鈑金技法)으로 만들어진 은제 소품인데, 형태는 재래의 경대·항아리·주자(酒子)·잔탁(盞托) 등 10㎝ 정도의 크기로 상품적인 경향이 엿보인다.
다음, 후기인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문의 작품들은 모두 나전칠기와 도자류·석공예류 일색이며, 금속공예는 제11회 특선작인 이남이(李男伊)의 「나비촛대」, 제13회 입선작 이용순의 「백동은입사화발」, 제16회 입선작 이남이의 「와룡촛대」만이 보인다. 이와 같이 이 시기의 우리나라 금속공예의 창작활동은 미흡한 편이며, 작가로서는 이남이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한편, 현대미술은 혼란기(1943∼1951)·전환기(1952∼1956)·정착기(1957∼1971년경)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그 가운데 응용미술 부문은 조선미술협회 공예부(1945)·조선공예가협회(1946)·조선상업미술가협회(1946)·조선산업미술가협회(1946. 1949년 대한산업미술가협회로 개칭)·생활미술연구회(1949) 등이 창설되어 활동을 하였을 뿐 아니라, 1950년을 전후한 이 시기에 홍익대학교·서울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 등 각 대학에 공예를 전공으로 하는 학과가 신설되어 효율적인 공예교육을 시도하였다.
특히, 1949년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國展)의 제4부로 공예부가 설치되었고, 1967년에는 대한민국상공업미술대전(약칭 商工業展) 공예부가 생겨 현대의 공예는 이 두 개의 공모전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이 중 순수공예활동의 장(場)인 국전의 작품경향은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제1기(1949∼1961년 무렵)는 전승공예를 되풀이한 시기, 제2기(1961∼1971년 무렵)는 공업과 기계의 영향을 받았던 시기, 제3기(1971년 무렵∼1981년 제30회 국전까지)는 현대적인 조형감각이 정착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전 중심의 공예 중에서 금속공예는 1950∼1960년대에 활동한 작가가 적은 편이어서, 1950년대의 작품은 금속이 부분적으로 가미된 한도룡의 「화기」(제6회, 1957) 정도이고, 1960년대는 허충회·박향숙(제10회, 1961), 방행자·임은자(제12회, 1963), 최현칠(제14회, 1965), 신현장(제16회, 1967), 장임식·나명희(제17회, 1968) 등을 꼽을 수 있다.
금속공예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실질적인 창작활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전반기부터 국전을 중심으로 최현칠·강찬균·유리지·김승희·이혜숙·장윤우 등이 새로이 활약하였고,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기존의 작가들뿐 아니라 남경욱·오영민·노용숙 같은 신진작가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1980년대부터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대한민국미술대전(大韓民國美術大典, 1982)이라는 명칭으로 젊고 새로운 작가들의 등용문이 되고 있으며, 그 동안 대학에서의 효과적인 교육과 금속공예가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한국 금속공예의 전통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특히, 1986년에는 공예 부문이 따로 독립하여 대한민국공예대전으로 새로이 탄생하게 되었고 1987년에는 제1회 한국현대장신구공모전이 열려 금속공예 중 장신구의 위치를 다시 한번 인식케 하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1980년대를 전후하여 금속공예만의 그룹이 활발하게 결성됨에 따라 비약적인 발전이 계속되어 한국귀금속공예협회(1979년 창립전시회)·홍익금속공예가회(1980년 창립전시회)·한국칠보작가협회(1983년 창립전시회)·서울금공회(1983년 창립) 등 동문·이념·기법에 의한 그룹이 창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크고작은 청년작가 그룹이 빈번한 전시회를 통해 금속공예 창작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근래의 금속공예 작품경향은 1980년대 초, 건축에서부터 받아들이기 시작한 포스트 모더니즘이 금속공예에도 도입되면서 개념 정의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의 외형적인 모습만을 모방하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1970년대의 탈기능의 오브제화 이후 미술계를 휩쓸었던 서양 사조 중의 하나로 공예계의 탈기능적 조형주의 경향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에 따라 공예의 개념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대두되면서 공예의 조형화 현상이 심화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일련의 공예의 조형화 현상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1990년을 전후해서 금속공예를 중심으로 공예 본래의 특성인 기능성에로의 복귀 움직임이 일어나 생활 속의 쓰임새를 찾는 작품들이 제작되는 경향이 일고 있다. 즉 1970년대 이후 기능을 배제한 실험적인 작품경향에서 벗어나 장신구·가구·생활소품 등 다양한 물품이 제작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지금까지의 전시장 중심의 시각적 공예에서 탈피해 곁에 두고 쓸 수 있는 실용적인 공예품에 가치를 두는 것으로서 1970년대 말부터 출현한 전문 매장과 개인적인 공방활동이 1980년대 이후 소규모 공방 활동으로 이어졌고, 현재도 문화상품 개발 붐에 힘입어 공예품의 전시장과 매장을 겸하는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최근 1990년대를 전후해 나타난 새로운 경향 중의 하나는 생활수준의 향상에 따라 실내장식과 가구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금속가구나 조명기구 같은 실내용품을 제작하게 되었는데, 이 점은 공예품 시장이 넓어져 간다는 것과 대중들이 공예품을 좀더 가까이할 수 있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 금속공예의 양상은 공예미에 대한 절대성과 공리성에 대한 이원적인 추구가 대중은 물론 작가들에게도 논란의 관점이 되고 있다.
때문에 작품의 형태에 있어서도 직관과 정감에 의한 자율적인 조형체로서 실용성에 준한 작품이나, 추상적인 이미지를 시각화시킨 작품 또는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탈피한 시도적인 작품들이 다양하게 공존하고 있다. 또한 재료와 기법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어 현대 공업문명 속에서 파생될 수 있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그에 따른 가공기술도 발전시켜 종래의 금속공예의 관념이 확대된 느낌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광복 이후 주체의식 없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서구문화에 밀려 단절되었던 우리의 문화전통이 사회전반에 걸친 복고풍의 유행과 함께 전통미에 대한 탐구로서 재조명되고 있으며, 금속공예 부문에서도 여러 작가들이 이에 맥을 같이하고 있다.
특히 공예미도 세계적인 보편성보다는 한국공예로서의 특수성이 더욱 추구되어야 할 시점이어서 우리의 전통적인 미의식을 탐구하며 주체적인 공예가치관을 확립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는 현대적인 예술의지로써 한국인의 미의식을 표출시킨 금속공예를 창작하여 대중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로 폭넓은 호응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