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선응(善應). 찰방 김훈(金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의성목사(義城牧使) 김여물(金汝岉)이고, 아버지는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유근(柳根)의 딸이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세운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이 되고,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개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뒤에 도승지를 거쳐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이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사에 임명되어 강화도 방어의 임무를 띠고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장으로, 수찬 홍명일(洪命一)을 종사관으로 삼아 함께 부임하였다.
당시 섬에는 빈궁과 원손 및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해 전직·현직 고관 등 많은 사람이 피난해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 섬 안의 모든 일을 지휘, 명령해 대군이나 대신들의 의사를 무시하였다.
또한 강화를 금성철벽(金城鐵壁)으로만 믿고 청나라 군사가 건너오지는 못한다고 호언하며, 아무런 대비책도 강구하지 않은 채 매일 술만 마시는 무사안일에 빠졌다.
그리고 김포와 통진에 있는 곡식을 피난민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배로 실어 날라 정실이 있는 사람에게만 나누어주는 처사로 민심을 크게 잃었다.
그러다가 청나라 군사가 침입한다는 보고를 받고도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지 않다가 적군이 눈앞에 이르러서야 서둘러 방어 계책을 세웠다.
하지만 군사가 부족해 해안의 방어를 포기하고 강화성 안으로 들어와 성을 지키려 하였다. 그런데 백성들마저 흩어져 성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나룻배로 도망해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다.
대간으로부터 강화 수비의 실책에 대한 탄핵을 받았는데, 인조가 원훈(元勳)의 외아들이라고 해 특별히 용서하려 했으나 탄핵이 완강해 사사(賜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