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서산 출신. 김두광(金斗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선경(金選慶)이고, 아버지는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이며, 어머니는 원명직(元命稷)의 딸이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오빠이다. 홍양해(洪量海)의 문인이다. 그를 비판하는 글을 남긴 심낙수(沈樂洙)와는 동문 사이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재주가 있어서 충청도 일대에 소문이 자자했고, 스스로도 사대부 중에 시세에 아부하지 않는 청류(淸流)로 자부했다 한다. 1763(영조 39) 강서현령으로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해에 도당록(都堂錄)에 올라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으며, 그 뒤 강원감사·승지를 역임하였다.
1772년 공조참판으로 있을 때, 청의(淸議)와 명절(名節)을 우선하는 정치적 결사 모임인 청명류(淸名流)가 발각되어 영조의 탕평책에 대한 배신으로 지목, 유배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김구주는 이를 당시 홍봉한(洪鳳漢) 외척 정치의 탓으로 돌려, 사촌 동생 김관주(金觀柱)와 함께 홍봉한을 제거하는 것이 의리라는 소를 올렸다.
당시 홍봉한은 왕세손이던 정조의 외가였으므로, 이 상소는 왕세손의 위치를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정조 즉위년에 역적으로 지목되었다. 또, 영조의 딸인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양자인 정후겸(鄭厚謙) 및 홍인한(洪麟漢)·정이환(鄭履煥)들과 결탁해 정조를 해치려 한 사실이 드러나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1784년에 왕세자 책봉으로 감등되어 나주에 이배되었다가 다음해 죽었다.
순조 연간에 김관주·심환지(沈煥之) 등 김구주와 가까운 인물들이 정조의 탕평을 보좌했던 인물들을 크게 살육해, 그 뒤 이 쟁단은 크게 확대되었다. 김한록·김상로(金尙魯)·신만(申晩)과 함께 사도세자의 죽음에도 책임이 있으며, 김종수(金鍾秀)·윤시동(尹蓍東)·유언호(兪彦鎬)·심환지 등이 겉으로는 청류를 표방했으나, 속으로는 김구주의 심복이라는 주장이 시파계(時派系) 당론서에 보여지면서, 외척으로서 국가에 화란을 일으킨 본보기로 지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