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기운(驥雲), 자는 유용(幼用), 호는 기서(沂墅). 의성군 점곡면(點谷面) 사촌리(沙村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김양식(金養植),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 김곤수(金坤壽)의 딸이다.
두 번이나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정시(庭試)에서 번번이 실패했다. 1835년(헌종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서 학문을 연마하다가 백부상(伯父喪)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1855년(철종 6)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참사가 있은지 120년이 지나도록 신원(伸寃)하지 못하자 이휘병(李彙炳)과 영남 사림을 대표하여 신원소(伸寃疏)를 올렸고,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書院毁撤令)이 내리자 김우수(金遇洙)와 함께 그 명령을 취소하도록 요구했다.
1881년 기독교의 포교(布敎)를 권유한 황준헌(黃遵憲)의 책략을 공박하여 이만손(李萬孫) 등과 연합하여 척사(斥邪)의 만인소(萬人疏)를 올렸다. 아버지 양식(養植)의 포상(褒賞)을 요청하여 실행하였고, 유문(遺文)을 수습해서 문집을 간행했다.
향교와 서원(書院)의 제례의식(祭禮儀式)을 태학례(太學禮)에 따라 제정했으며, 김양범(金養範)과 김석유(金奭裕) 등과 소사(蕭寺)에서 강회(講會)를 열어 후진을 육성했다.
안동 백일장(安東白日場)의 시관을 여러 번 지냈으며, 언어를 중히 여겨 한번 허락한 일은 반드시 실천하고, 학문의 요점은 자세하게 살피는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기서문집(沂墅文集)』 2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