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연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에, 좌우위산원, 첨의시랑찬성사, 첨의중호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시호
영신(榮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314년(충숙왕 1)
본관
언양(彦陽)
주요 관직
좌우위산원|첨의시랑찬성사|첨의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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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후기에, 좌우위산원, 첨의시랑찬성사, 첨의중호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언양(彦陽). 증조할아버지는 김취려(金就礪), 할아버지는 김전, 아버지는 김양감(金良鑑)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 승려가 되었으나 환속하였다. 여동생 숙창원비(淑昌院妃)가 충렬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기회로 30세에 좌우위산원(左右衛散員)이 되었고, 그 뒤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郎贊成事)에 이르렀다.

1305년(충렬왕 31)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송방영(宋邦英)·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충선 두 왕의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책동하고, 충선왕비 보탑실련공주(寶塔實憐公主)를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에게 개가시키려는 것을 보고 원나라의 중서성에 그 내용을 고하였다.

또한, 왕에게 환국할 것을 종용했으나, 공주의 노여움을 사서 장형에 처해졌다. 1307년에 충선왕의 명으로 고려에 돌아와 국정쇄신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새로이 80여 인의 관리를 임명하여 실권이 충선왕에게 돌아가게 하는 데 공이 컸다.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재즉위한 뒤 첨의중호(僉議中護)가 되었으며, 원나라로부터 신무장군 진변만호(信武將軍鎭邊萬戶)에 언양군(彦陽君)으로 봉해졌다. 그뒤 진변만호부다루가치(鎭邊萬戶府達魯花赤)가 더해졌으며 원나라에 다녀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호는 영신(榮信)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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