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의열단에서 활동하며 조선혁명간부학교 군사교관, 김원봉 비서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김빈(金斌), 김빈(金彬), 조국동(曺國棟)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9년(고종 36)
사망 연도
1946년
출생지
부산
정의
일제강점기 때, 의열단에서 활동하며 조선혁명간부학교 군사교관, 김원봉 비서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개설

이명은 김빈(金斌)·김빈(金彬)·조국동(曺國棟). 부산 출신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9년 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한 뒤 그 해 1919년 11월 10일 길림(吉林)에서 조직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 폭탄투척의거에 관여하였다. 당시 의열단원 박재혁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옥중 단식 순국하였다.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의 윤봉길 의사(尹奉吉義士) 폭탄의거 후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남경(南京) 교외 탕산(湯山) 혹은 강소성(江蘇省) 강녕현(康寧縣)에 설립되었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 약칭 조선혁명간부학교, 이칭 조선혁명간부훈련반, 통칭 의열단 간부학교) 제2기 군사교관으로 1933년 9월 16일부터 1934년 4월 20일까지 활동하였다.

1932년 10월 25일에 의열단(남경에 근거)·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상해)·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남경)·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만주·북경)·한국광복동지회(韓國光復同志會) 대표 9명이 상해의 동방여사(東方旅舍)에서 결성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 제2차 대표회가 1934년 3월 1일 남경(南京)에서 개최되었다.

이에 박건웅(朴建雄) 등과 함께 의열단 대표로 참석,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결속을 다지고 대일항전의 효과적인 방안을 모색하였다. 1935년 7월 5일 의열단·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 등 5개 단체 대표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해체하고 민족유일당으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수립하자, 의열단파 민족혁명당의 간부 겸 김원봉의 비서로 능숙한 중국어 실력을 이용해 중국측에 보내는 문서 집필을 담당하였다.

1938년 중국의 한커우[漢口]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조직되자 이에 관계하였고, 1941년 조선의용대의 김원봉 계열 부대가 광복군(光復軍) 제1지대로 편입되자 광복군에 참여, 1945년 왕영재(王英哉)·진춘호(陳春浩)·여정순(呂正淳)·호건(胡建) 등과 인도(印度) 파견 공작원으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 남경(南京)에 머무르며 활동하다 1946년경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유공자공훈록』 12·13권(국가보훈처, 1996)
집필자
조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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