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충청도에서 태어난 그녀는 학업과 생계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댄서로 일하면서 타고난 예능에의 불을 당기게 된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연극무대와 영화가를 전전했고, 연극무대에 처음 선 것은 1931년 12월 극단 중외극장의 창립단원으로서 미나도좌에서의 창립공연 <선로공부의사>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이어서 <사람 좋은 형리>·<사랑이 깊어갈 때> 등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중외극장이 해산되자 태양극장으로 옮겨서 배우생활을 계속했지만 평범한 외모 등으로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 뒤에는 극단 명일극장에 들어가서 동료배우 김선초(金仙草)와 막간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었다. 잠시 나운규(羅雲奎) 감독의 <신아리랑>에 출연도 했지만 그녀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1935년 동양극장이 세워지고 청춘좌가 창단되면서부터였다.
홍해성(洪海星)으로부터 정식으로 연기수업을 받은 그녀는 스스로 분장술을 익혀서 혈액에 맞추는 분장법과 눈화장을 잘 했다. 근면·성실했던 그녀는 작품분석력과 화술이 뛰어났으며 우리말을 아름답게 다듬어 토해내는 재능이 있었다. 결국 그녀는 1943년 조선 연극문화협회가 주최한 연극경연대회에서 여자연기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광복 직후에도 꾸준히 연기생활을 했으며, 1947년 극예술협회의 창립단원으로서 활동했다. 당대 최고의 배우라 할 김동원(金東園)과 콤비를 이루어 <자명고>를 비롯하여 <마의태자>·<은하수>·<대춘향전> 등 극협의 모든 작품에서 여자주역으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였다.
1950년 국립극장이 창립되자 전속 신협단원으로서 개관공연인 <원술랑>과 <뇌우> 등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평범한 주부로서 살았지만 일단 무대에만 서면 연기의 동작 하나하나가 나비처럼 날렵했고 음색은 은쟁반에 옥 굴러가는 듯 투명했다.
광복 전후 연극계에서는 단연 최고의 여배우였는데, 후배 연극인들에 대한 연기 지도도 남달랐다. 그러나 6·25전쟁 중 월북하여 인민배우가 되었고 1980년 예술영화촬영소 소속배우로 활약했으며, 저들이 만든 영화 <어머니의 마음>에서 주인공 어머니역으로 원숙함을 보여준 바 있다. 여배우가 무척이나 귀했던 1930년대 중반에 동양극장 무대를 통해 등장하여 6·25전쟁 직전까지 신극무대를 장식했던 대표적 배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