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 출신.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상해로 망명하였다. 1919년 7월 7일에 개최된 제5회 의정원회의 때 함경도 대표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6월 12일 구국모험단(救國冒險團)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다.
1919년 9월 4일부터 임시의정원에서 임시헌법개정안과 임시정부개조안의 3회 독회에 들어가 토의할 때 여운형(呂運亨)과 같이 신사상을 나타내는 문안을 조정하는 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같은 해 9월 15일 밤에 상해 애인리(愛仁里)에서 전일(田一) 등과 의논한 뒤, 작탄(炸彈) 제조 중 폭발사고를 일으켜 전일은 즉사하였다. 그해 11월 국내 조사원이 되어 국내로 잠입하였다.
함흥 등 함경남도 지역을 내왕하면서 그 지방의 유력자·재산가·학교·종교 등의 상황을 조사하여 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