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석 ()

무주 도산서원 우측면
무주 도산서원 우측면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호조참판, 병조참판,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은경(殷卿)
시호
충목(忠穆)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45년(세종 27)
사망 연도
1493년(성종 24)
본관
광산(光山)
주요 관직
형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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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호조참판, 병조참판,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은경(殷卿). 할아버지는 김원손(金遠孫)이고, 아버지는 강화부사 김수(金洙)이며, 어머니는 권항(權恒)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65년(세조 11)에 진사, 그 해 가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학유 겸 예문관검열(成均館學諭兼藝文館檢閱)에 보임되었으며, 뒤에 군자시주부(軍資寺主簿) · 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470년(성종 1) 재행겸비자(才行兼備者)를 선발할 때 김종직(金宗直)과 함께 뽑혔으며, 1472년 병조정랑이 된 뒤 검상(檢詳) · 사인(舍人)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다.

1479년 성균관의 사예(司藝)로서 원수(元帥) 윤필상(尹弼商)의 종사관이 되어 건주위(建州衛) 토벌에 참여하였으며, 1481년 사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승정원의 동부승지 · 우부승지 · 우승지 · 도승지와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조참의로 재직 중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탄핵되어, 1487년 충청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판결사(判決事)를 겸한 뒤 경상도 · 강원도의 관찰사, 호조 · 병조의 참판을 거쳐 1491년 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 예조참판을 거쳐 1493년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관리가 되어서는 사람의 뜻을 살피기에 힘써 특별히 마음을 써서 대접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사관의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참고문헌

『세조실록(世祖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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