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1962. 호는 소암(蘇巖). 개성 출신. 1912년 3월에 개성의 한영서원(韓英書院) 초등과를 졸업하고, 곧 중등과와 고등과를 다니면서 신학문을 배웠다. 한영서원 고등과 시절에 조선총독부에서 시행하는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했다.
1921년 2월부터 개성학당 상업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이기세(李基世)가 주도한 극단 예술협회(藝術協會)와 관련을 맺게 되었고, 이것이 희곡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예술협회의 요청으로 「정치삼매(情痴三昧)」·「시인의 가정」 등을 썼고, 계속해서 「나의 세계로」·「연(戀)의 물결」·「구리십자가」 등을 발표했다.
1922년에는 이 5편을 묶어서 우리나라의 첫 희곡집인 『황야에서』를 발간하였다. 그 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배우면서 불교조선협회 주사 겸 여자동포원 주간으로 일했다. 1925년 고한승(高漢承)·김영팔(金永八)·이경손(李慶孫)·안석주(安碩柱) 등과 극문회(劇文會)라는 연극연구단체를 창립했으나, 이 단체가 흐지부지됨으로써 그는 언론계로 옮겼다.
1927년 경성일보사에 기자로 입사했고, 매일신보의 통신부장·오사카지사장 및 경북지사장 등으로 일했다. 광복 이후에는 대구 영남일보 초대편집국장에 이어 사장을 10여 년간 역임했다.
주로 언론인으로서 활약했으나, 그의 5편의 희곡은 우리나라 근대희곡작가가 추구한 두 가지 테마 중 하나인 전통인습 타파를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작품내적인 의미가 있다. 그의 작품은 당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진보적인 도덕관을 제시하였으나, 작품내용은 통속극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