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신.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중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제2고등학원을 수료한 뒤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광범한 독서와 쓰키지소극장(築地小劇場) 관람으로 문학과 연극에 눈뜨게 되었다. 대학 재학중인 1934년에 단막극 <광풍 狂風>과 <동맥 動脈>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되었다.
대학을 수료한 뒤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 창립동인으로 활약했고, 귀국 후엔 문학수업에 전념하여 1938년에는 단편소설 <용녀 龍女>(뒤에 素服으로 개제)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소설과 희곡을 발표했으며, 신문이 폐간되자 동양극장(東洋劇場) 전속극작가가 되어 신파극본을 쓰면서 소설도 발표했다. 민족항일기 말엽에는 생활을 위해 고려영화주식회사 선전부장, 유한양행 사원 등으로 근무했다.
광복을 맞아 어린이신문사 주간을 맡았고, 라디오드라마도 쓰기 시작했으며, 상업극단들과 연결을 맺고 대중적 작품을 많이 썼다. 1947년 10월에는 중간극(中間劇)을 표방하는 ‘신청년(新靑年)’이라는 극단을 조직하여 전속작가로 활동했고, 이 시기에 연 6, 7편의 장막극을 발표할 정도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
6·25전쟁 중에도 피난지에서 작품을 발표하다가 1952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키나와(?繩)의 유엔군방송국에서 8년간 근무하는 동안 작품활동을 중단했다. 1960년에 귀국하여 방송드라마를 썼다.
그는 극작가·소설가·방송작가로 변신한 대중작가로서, 희곡·소설·방송극을 각각 20여 편이나 남겼다. 작품세계는 비극적 세태를 사실적 기법으로 대담하게 묘파한 것이 특징이다. 즉, 민족항일기에는 일본 통치가 빚은 우리 민족의 궁핍을 묘사했고, 광복 직후에는 식민지가 남긴 유산과 그 후유증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희곡은 사실주의 내지 자연주의 계열이며, 후기에는 낭만주의적 색채도 띠었다. 특히, 그는 쓰키지소극장에서 관람한 하우프트만이나 고리키의 작품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 데다 가난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민족의 궁핍화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환경에 대한 깊은 관심은 그로 하여금 우리 나라 근대연극사에 있어서 가장 뚜렷한 환경극작가(環境劇作家)가 되게 하였다. 대표작으로는 희곡 <혈맥 血脈>·<단층 斷層>·<돼지>와 소설 <파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