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황해도 신천(信川)에서 출생했다. 1934년 동요 「반딧불」이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1935년 「방울새」가 『아이생활』에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많은 동요와 동화 및 동시를 창작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니혼[日本]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유학 당시 아동지 『고향집』을 발행했다. 졸업 이후 만주를 유랑하며 소설을 습작하다가 귀국, 1941년 이구조(李龜祚)와 서울의 신촌상업학교에서 근무했다. 1940년을 전후해 『아이생활』의 집필 동인과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가톨릭소년』, 『소년』,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에 작품을 게재했다.
1942년 『아이생활』 12월호에 게재한 「애국기 소국민호」라는 동시에서는 전시체제기 일제에 의해 강요된 총후보국(銃後報國)의 하나인 ‘애국기’ 헌납을 위한 국방헌금의 참여를 노래했다. 연이어 1943년 1월호에 게재한 「대일본의 소년」에서는 장차 조선의 소년들을 '대일본의 일꾼'으로 성장할 자원으로 노래했다. 한편 1941년 당시 서대문경찰서의 고등계 형사로 일했다는 증언이 있으나, 기록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해방 이후 최병화(崔秉和)·연성흠(延星欽) 등과 함께 아동극단 호동(好童)을 조직했으며, 경기도 경찰 간부로 근무했다고 알려져 있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부산에서 『중학시대』라는 학생잡지, 1953년 『소년태양』(주간지, 태양신문사 발행)을 편집했고, 환도 이후 『건아시보(健兒時報)』의 주간을 맡았다. 1960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한국자유문학가협회·한국문인협회 등의 간부를 거쳐, 1962년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위원장·문교부 우량아동도서 선전위원장, 1971년 한국아동문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84년 국제 펜클럽 한국 대표로 일본 도쿄대회 참가 중 사망했다.
대한민국 옥관문화훈장(1989), 제1회 대한민국 아동문학상(1979)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