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자구(子具). 영암 출신. 아버지는 이성현감(利城縣監) 김극조(金克祧)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어린 나이로 용맹이 알려져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 해 여름에 무과에 급제해 경상도방어사 고언백(高彦伯)의 막하에 있다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적을 만났다. 사인(士人) 조경남(趙敬男) 등과 궁장현(弓藏峴)에서 20여 명을, 둔원내촌(屯院內村)에서 10여 명을 목베었다.
장치(獐峙)에서는 혼자서 수십 명을 목베어 선혈이 반석에 낭자해 후인들이 이 반석을 ‘혈암(血巖)’이라고 불렀다. 이듬해 전라병사 이광악(李光岳)을 따라 남원에 있을 때, 아버지를 무고해 죽게 한 한덕수(韓德脩)가 도원수 권율(權慄)의 비장으로 병력 점검을 위해 오자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다.
1601년(선조 34) 소파아권관 겸 단련사(小坡兒權管兼團練使)가 되어 명나라에서 보내오는 군량의 운송 책임을 맡았다. 1603년 선전관이 되고 이듬해 금모포만호(黔毛浦萬戶), 1607년 남원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뒤에 서울에 올라와 한덕수를 찾아 쏘았으나 죽이지 못하고 수년간 투옥되었다.
1615년(광해군 7) 관무재(觀武才)에 급제, 고산리첨사(高山里僉使)가 되고 다음 해 절충장군, 1618년 내금위장에 임명되었다가 곧 만포첨사(滿浦僉使)로 옮겨졌다. 1622년 평안좌도방어사, 다음 해 평안도방어사 및 창성방어사를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원수(元帥) 장만(張晩)의 선봉장으로 안현(鞍峴)에서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책록되고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이어 구성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다시 복관되어 부총관을 거쳐 전라우수사가 되었으나 모략으로 일시 투옥되었다. 그 뒤 곧 풀려나 1634년에는 훈련원도정·황해도병사를 지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양무(襄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