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식 ()

외교
인물
해방 이후 대한적십자사 법률고문, 법전편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법조인. 정치인 · 외교관.
이칭
이칭
金本溶植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3년 11월 11일
사망 연도
1995년 3월 31일
본관
김해(金海)
출생지
경상남도 통영
정의
해방 이후 대한적십자사 법률고문, 법전편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법조인. 정치인 · 외교관.
생애 및 활동사항

1913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출생했다. 통영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1년 경성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같은해 도쿄의 주오[中央]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입학, 1934년 졸업과 동시에 같은 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1935년 학교 대표로 미일(美日)학생회의에 첨석하기 위해 미국에 다녀왔고, 1937년 졸업했다.

1940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후 1941년부터 경성지방법원 및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사법관 시보, 검사대리를 거쳐, 1943년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청진지방법원 예비판사 및 판사로 근무했다.

판사 재직 시 1943년 5월 '조선독립 희망 및 일본군 패배 유언비어 유포' 등의 혐의로 기소된 전충한(全忠漢) 등의 재판에 참여하였다.

해방 이후 1946년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고, 조선은행 법률고문을 맡았다. 1948년 3월에 미군정청 군사재판으로 진행된 '장덕수(張德秀)암살사건'에서 김구(金九)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변호인으로 활동했다.

1948년 대한적십자사 법률고문 및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을 거쳐 1949년 외무부에 들어가 그해 6월부터 주홍콩 영상, 주호노룰루 총영사를 지냈다.

1951년 주일본 한국대표부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되어 1952년부터 1953년까지 한일회담 한국측 대표를 맡았고, 1957년까지 주일본 한국대표부 공사로 재직했다.

이후 1957년 주프랑스 공사, 1960년 주영국 대사, 1962년 주필리핀 대사 등을 거쳐 1963년 외무부 · 무임소 장관,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주유엔대표부 대사,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외무부 장관, 1973년부터 1974년까지 국토통일원 장관, 1974년부터 1977년까지 주영국대사, 1981년까지 주미대사 등으로 재직했다.

이후 대한적십자사 총재,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초대 위원장, 서울올림픽선수촌장, 국토통일고문회 의장, 서울평화상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95년 3월 31일 사망했다.

상훈과 추모

보국훈장 국선장(1963년 12월), 수교훈장 광화장(1970년 8월), 청조근정훈장(1974년 9월), 프랑스 오르드르나시오날 뒤메리트(1988년 9월), 체육훈장 청룡장(1989년 4월)을 받았다. 2013년 출생지인 통영에 그와 동생 김용익을 기념하는 '김용식 · 김용익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1(민족문제연구소, 2009)
『새벽의 약속』(김용식, 김영사, 1993)
『희망과 도전』(김용식, 동아일보사, 1987)
『대한민국행정간부전모(大韓民國行政幹部全貌)(4293년판)』(1960)
「김용식 전장관을 추도하며 나라사랑에 바친 한평생」(『동아일보』 1995.4.2 ; 『경향신문』)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직원록(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
집필자
심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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