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명숙(明叔), 호는 미촌(縻村)·율촌(栗村). 기묘명현(己卯名賢) 김정(金淨)의 후손이며, 전한(典翰) 김천우(金天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김가빈(金可賓)이고, 아버지는 김변(金汴)이며, 어머니는 능성구씨(綾城具氏)로 현감 구영준(具英俊)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고려 말기부터 대대로 보은에 거주하였다. 나만갑(羅萬甲)·조직(趙溭) 등과 교우관계가 깊었다. 유생의 몸으로서 이시백(李時白)의 권유로 인조반정의 모의에 참여하였으나, 거사 당일의 군사행동에는 가담하지 않았고, 인조를 맞이하는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
반정이 성공한 뒤 논공행상을 할 때 이후원(李厚源)과 함께 극력 사양하였으나,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봉되고,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공조좌랑을 거쳐 김집(金集)과 함께 학행으로 추천받아 지평(持平)에 발탁되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모반에 대한 고변이 있자, 이를 믿지 않고 백방으로 이괄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모반사실이 분명하여짐에 따라 승지 김자점(金自點)의 건의로 투옥되었고, 이어 반란군의 공격으로 조정이 피난할 때 적에게 이용될 염려가 있다는 김자점의 주장에 따라 옥중에서 참살당하였다.
1661년(현종 2) 부인 이씨의 억울함을 소송으로 해결하여 훈작(勳爵)이 복구되고 호조판서·월성군(月城君)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강민(剛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