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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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영 목사
김인영 목사
개신교
인물
일제강점기 감리교신학교교장, 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 이사 등을 역임한 목사. 신학자.
이칭
이칭
金村仁泳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3년(고종 30) 5월 1일
사망 연도
1953년 6월 11일
출생지
서울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감리교신학교교장, 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 이사 등을 역임한 목사. 신학자.
생애 및 활동사항

1893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912년 개성의 한영서원(韓英書院), 1915년 경성의 피어선성경학원, 1920년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 등을 졸업했다. 1922년 9월 목사 안수를 받고, 1921년에서 1925년까지 협성신학교 교사로 재직 중 미국 에모리대학(Emory University)에 유학, 1927년 신학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1932년까지 협성신학교 학감으로 재직하면서 『신학세계(神學世界)』의 편집인으로 활동했으며, 1930년 12월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 이사를 맡았다. 1932년부터 1939년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1941년 5월 감리교신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38년 5월 8일 '내선인 기독교인의 단결과 총후보국'을 목적으로 조직된 내선인기독교연합회에 평의원, 1940년 10월 국민총력 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 문화부장을 거쳐 1941년 3월 양주삼(梁柱三) 등과 함께 이사를 맡았다. 같은해 12월 동양지광사(東洋之光社) 주최 '미영타도좌담회(米英打倒座談會)'에서 「앵글로 색슨인의 유색인에 대한 태도」에 대해 발언했다. 이외에도 「새사람을 입으라」(『조선감리회보』, 1942년 1월) 및 「기독자의 신각오」(『기독교신문』, 1942.6.17) 등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협력을 촉구했다. 해방 이후인 1946년 9월부터 정동제일교회를 담임했고, 재건파와 부흥파로 갈라진 감리교회를 1949년 대한기독교감리회 통합·탄생시키는데 공헌했다. 1953년 6월 11일 사망했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1(민족문제연구소, 2009)
『정동제일교회구십년사』(정동제일교회역사편찬위원회, 1977)
『기독교신문』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감리회보』
『조선총독부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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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심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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