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원은 해방 이후 『감은사』, 『한국지석묘연구』 등을 저술한 미술사학자이다. 1927년 함흥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독일 뮌헨대학 철학부에서 교육학과 고고학을 전공했다. 문화재 위원(현, 문화유산 위원)을 비롯하여 UNESCO한국위원회 위원, 한일 회담 대표 등을 역임했다. 최초로 감은사지와 금강사지를 발굴하는 등 과감한 학술 조사를 실시했다. 감은사지 발굴 조사보고서인 『감은사』와 지석묘 발굴 조사보고서 『한국지석묘연구』는 발굴 조사 보고서의 규범이 되고 있다. 광복 후 국립박물관장에 취임하여 1970년 퇴임하기까지 박물관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호는 여당(藜堂). 함경남도 함주 출신. 아버지 학호(鶴鎬)와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27년 함흥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독일 뮌헨대학 철학부에서 교육학과 고고학을 전공, 1934년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34년부터 1940년까지 벨기에 켄트대학 헨체(Hentze, C.) 교수를 사사하고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봉직하였다. 광복 후 국립박물관장에 취임하여 1970년 퇴임하기까지 박물관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54년부터 학술원 회원을 지내면서 우리 학술원이 국제학술원연맹(Union Academie Internationale)의 정식 회원으로 가입하는 데 기여하였다. 1957년부터 1976년까지 동아문화연구위원회(Harvard-Yenching Institute 서울지부)를 이끌면서 6·25 후의 어려움 속에서 연구비 등을 관리하여 학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문화재 위원(현, 문화유산 위원)을 비롯하여 UNESCO한국위원회 위원, 한일 회담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광복 당시 한국인 전문가가 없는 박물관에서 미군정 당국과 교섭하여 총독부박물관 책임자이던 아리미쓰(有光敎一)의 귀국을 1년간 연장시키면서 박물관 소장품을 인수하였다. 그리고 경주 호우총(壺杅塚)을 발굴하여 박물관 직원들로 하여금 고고학적 소양을 쌓게 하였다. 이 호우총에서 신라 고분으로서는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명문(銘文)이 있는 청동 그릇, 즉 호우가 출토되어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6·25 중에는 서울에 남아 있으면서 북측에 의한 문화재(현, 국가유산) 반출을 암암리에 저지하였다. 다시 2차 공세 때에는 미군의 도움을 얻어 문화재를 부산으로 대피시켰다. 수복 이후에는 문화재의 해외 전시 등 활발히 벌인 국제 교류로 한국문화 선양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또한 과감한 학술 조사를 실시하여 박물관이 연구 기관으로서의 기틀을 다지게 하였다. 최초로 감은사지(感恩寺址)와 금강사지(金剛寺址)를 발굴하였는데, 감은사지의 발굴 조사보고서 『감은사』는 한국일보 출판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7년에 걸친 지석묘 발굴 조사를 거쳐 간행된 『한국지석묘연구』는 3·1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이들 보고서는 지금까지도 발굴 조사 보고서의 규범이 되고 있다.
1965년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 Treasures of Korean Arts (김원룡과 공저)로 5·16민족상을 수상하였다. 『한국미술』(김리나와 공저)은 영어판 · 일어판으로도 간행되었는데, 영어판 Arts of Korea는 일본국제문화교류협회의 출판문화상 대상을 획득하였다. 또한 진단학회 이사로서 『한국사』 간행을 적극 추진하여 방대한 업적을 완성하였고, 그밖에도 『단군신화의 신연구』 등 많은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한편, 고고학이나 미술사를 전공하는 학자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국내에서의 훈련은 물론, 부문별로 각국에 유학을 보내 오늘날의 한국 고고학과 미술사 학계의 인재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김원룡 · 윤무병 · 한병삼 · 이난영 · 안휘준 · 정영화 등이 모두 그 일환으로 외국에 나가 교육을 받았다. 두 딸인 리나와 영나가 각기 동양과 서양의 미술사를 전공하였다.
항상 정도를 지켜 고집스럽고 엄격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유머도 풍부하였다. 천부적인 외국어 실력으로 널리 세계의 석학들과 친분을 맺어 국제인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1970년 국립중앙박물관장 퇴임 시에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