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했다. 경성(鏡城)고등보통학교를 졸업, 1928년 『조선일보』에 「가을비」·「하소연」을 발표했다. 1934년 「임자 없는 나룻배」로 『별건곤(別乾坤)』 주최 제1회 신유행 소곡(小曲) 현상공모, 1935년 민요 「베 짜는 각시」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1936년 민요 「망향곡」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되었다. 1935년부터 1년간 우성(雩城)학교에서 근무, 1937년 가을 도쿄의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예술과에 입학, 1940년 졸업했다. 재학 중이던 1939년부터 1941년까지 도쿄의 부인화보사(婦人畵報社) 및 해양문화사(海洋文化社)에서 근무하면서 다수의 시와 평론을 발표했다. 1939년 「귀로(歸路)」, 「고원(故園)의 시」, 「할아버지」 등의 시를 『문장(文章)』에 발표했다. 같은해 『문장』에 게재한 시론 「나의 작시설계도(作詩設計圖)」에서는 우리나라 현대시사 최초로 '선시(禪詩)이론'을, 「시문학의 정도(正道)」에서는 순수시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1942년 귀국하여 전시총동원체제 구축의 일환으로 발행된 조선총독부의 어용 문학잡지 『국민문학』의 편집을 담당했다. 같은해 조선문인협회가 ‘조선인 징병제’ 실시와 관련하여 1942년 6월 개최한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자김'이라는 좌담회에 참석했고, 12월 징병제 선전을 위한 '순국영령방문단'의 일원으로 함경남도에 파견되었다. 또한 시 「원정(園丁)」(『국민문학』 1942.1)에서는 일본과 조선의 동조동근(同祖同根)론을, 「조선시단(朝鮮詩壇)의 진로」(『매일신보』 1942,11,17)라는 평론에서는 '국민시 운동은 대동아공영권운동이라는 개념을 수립하는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1943년 5월 해군기념일을 맞아 조선문인보국회 시부회(詩部會)가 개최한 낭독회에서 일본의 진주만 기습과 서전의 승리를 노래하는 자작시 「대기(待機)」를 낭독했고, 6월에는 조선문인보국회 시부회의 간사를 맡았다. 같은해 7월에 발간한 일본어 시집 『어머니의 노래[たらちねのうた]』발간했고, 여기에는 자신이 후기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작시(作詩)의 동기가 친일 성향을 띤 「합창에 대해서[合唱について]」·「풍속(風俗)」 등이 포함되었다. 한편 8월에는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찬양하는 「모자」(『국민총력』 1943.8)를 발표했다. 이외에도 「유년(幼年)-징병의 시[徵兵の詩]」(『국민문학』 1942.7), 「조양영발(朝陽映發)-신춘의 기원」(『매일신보』 1943.1.9), 「오늘 육군기념일[けふ陸軍記念日]」(『경성일보』 1943.3.10) 등 다수의 친일 관련 시와 글을 남겼다. 1944년 2월 매일신보사 입사했고, 여기서 발행하는 월간 『대일본부인 』 조선판의 편집주임으로도 활동했다. 같은해 9월 27일 사망했다.
김종한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4: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11∼238)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