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의 손자이며, 민애왕의 아버지이고, 흥덕왕의 아우이며, 혜충대왕(惠忠大王)으로 추봉된 인겸태자(仁謙太子)의 넷째아들이다.
817년(헌덕왕 9)부터 821년까지 약 4년간 집사부시중(執事部侍中)을, 822년부터 835년까지 약 13년간 상대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므로 헌덕왕 13년에 죽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은 잘못이며, 흥덕왕 10년(835) 이후에 죽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헌덕왕과 흥덕왕의 아우이기도 한 그는 이 두 왕 연간에 집사부시중과 상대등 등을 역임하면서 822년에는 김헌창(金憲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헌덕왕 때는 정사당(政事堂)에서 내외관(內外官)의 전주(銓注: 인물을 심사해 알맞은 일자리를 배정하는 것)를 맡아보면서 인사 문제의 실권을 맡는 등 당시 최고의 정치적 실력자로 군림하였다.
그리고 흥덕왕이 아들이 없어 선강태자로 책봉되었으나, 흥덕왕보다 먼저 죽었다. 그의 딸은 희강왕의 비인 문목왕후(文穆王后)이며, 아들 명(明)은 희강왕을 자살하도록 하고 스스로 즉위해 민애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사위 희강왕이 즉위함으로써 갈문왕으로 추봉(追封)되고, 아들 민애왕이 즉위한 뒤 그는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그의 부인인 귀보부인(貴寶夫人)은 선의태후(宣懿太后)로 추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