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년(현종 1)에 거란병이 대거 침입하여 통주(通州: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에서 강조(康兆)의 군대를 크게 이기고 계속 전진하자, 장군으로서 김계천(金繼天)·이원(李元)·신영한(申寧漢) 등과 좌우기군(左右奇軍)을 거느리고 완항령(緩項嶺)에 복병하였다가 그 선봉을 무찔렀으며, 뒤에 상장군이 되었다.
1014년에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중추원 일직(日直) 황보유의(皇甫兪義)가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백관(百官)의 녹봉(祿俸)에 충당하게 함으로써 무신들의 불평이 높아지자, 상장군 최질(崔質)과 함께 병사들을 충동하여 반란을 일으켜 장연우·황보유의를 귀양보내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무관으로 상참(常參) 이상은 모두 문관을 겸하게 하는 동시에 어사대(御史臺)를 금오대(金吾臺)로, 삼사(三司)를 도정서(都正署)로 고치는 등 무관들을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다.
1015년(현종 6) 왕과 내통한 서경유수판관(西京留守判官) 이자림(李子琳, 王可道)의 계략으로 왕이 서경 장락궁(長樂宮)에서 베푼 잔치에 참석하였다가 최질·이협(李協)·최가정(崔可貞)·석방현(石邦賢) 등의 무신들과 함께 피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