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경인(景仁), 호는 수북정(水北亭). 김약평(金若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희려(金希呂)이고, 아버지는 별제 김난손(金鸞孫)이며, 어머니는 정랑 구숙간(具叔幹)의 딸이다.
1589년(선조 22) 유학으로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정자·정언·주서 등을 역임하였다. 1596년 북평사(北評事) 등을 거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602년 형조정랑이 되었다. 외직으로는 영변·회양의 수령을 거쳐 1605년 한산·양주 등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모두 선정을 베풀어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광해군 말년 정치의 문란으로 반정을 도모한 김류(金鎏)·이귀(李貴)로부터 가담할 것을 종용받자, “이미 광해군의 녹을 먹었으니 어찌 가담할 수 있겠는가?”라고 거절하고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유현(遺賢)으로 천거되어 부제학을 제수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아들에게도 묘비에는 양주목사라고 쓸 것을 명하는 절개를 보였다. 학문에 힘썼으며 시문을 좋아하여 낙향하여서는 백마강가에 정자를 짓고 날마다 동지(同志)와 더불어 글과 술로 소일하였으며, 스스로를 강상풍월주인(江上風月主人)이라 칭하였다.
당시의 거유 김장생(金長生)·신흠(申欽)·황신(黃愼)·서성(徐渻)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수북정집(水北亭集)』이 있었으나 화재로 거의 소실되고 낙본만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