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세찬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대사간, 대사헌, 한성우윤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비승(丕承)
송재(松齋)
시호
희민(僖敏)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98년(연산군 4)
사망 연도
1551년(명종 6)
본관
금성(錦城)
주요 관직
한성우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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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대사간, 대사헌, 한성우윤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비승(丕承), 호는 송재(松齋). 할아버지는 현감 나은제(羅殷制)이고,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 나빈(羅彬), 어머니는 찰방 윤노겸(尹勞謙)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25년(중종 20) 사마시에 합격하고 1528년 별시 문과에 급제, 나주·황주의 훈도(訓導), 성균관학유를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1534년(중종 29) 정시(庭試)에서 예양(禮讓)에 관한 책문(策文)을 지어 올렸으나 책문 내용에서 권신 김안로(金安老) 등의 전횡과 비리를 통박한 것이 문제가 되어 김안로 일파의 탄핵을 받고 고성(固城)에 유배되었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다시 봉교로 기용되었고, 1538년(중종 33) 탁영시(擢英試)에서 장원을 차지해 문명을 떨침과 아울러 이후 수년 간 병조정랑·병조좌랑, 홍문관의 수찬·교리·응교·전한, 사헌부의 지평·장령·집의, 사간원의 헌납, 시강원의 문학·필선·보덕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1544년(중종 39) 이조참의로 특승(特陞)된 뒤 승정원동부승지·성균관대사성·판결사를 역임했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는 윤원형(尹元衡)이 유관(柳灌) 등을 탄압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체직당했다.

그 뒤 곧 대사헌이 되었지만, 권신 이기(李芑)와의 알력으로 일시 면직됐다. 뒤에 한성우윤으로 문소전(文昭殿)에 인종을 부묘(祔廟)하려다가 전주부윤으로 좌천되어 재직 중 병으로 죽었다.

두 차례의 장원급제로 문명을 떨쳤으며, 권신을 서슴지 않고 탄핵하는 기개가 있었다. 나주의 송재사(松齋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재선생유고(松齋先生遺稿)』 4권이 있다. 시호는 희민(僖敏)이다.

참고문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해동잡록(海東雜錄)』
『송재유고(松齋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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