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목판은 모두 43판으로 ‘대우수전’ 6판, ‘경재잠’ 26판, 기타 11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우수전 6판 중 4판은 구판이며, 2판은 1904년에 본떠 새긴 것으로 가로 55.5㎝, 세로 29.5㎝, 두께는 5㎝이다. 경재잠 26판 중 구판은 10판으로 1809년에, 나머지 16판은 1904년에 본떠 새긴 것으로 가로 20㎝, 세로 94㎝, 두께 20㎝이다. 기타 11판은 내용파악이 불가능한 상태로 남아있다.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교촌리의 남강사는 우암 송시열(宋時烈)을 추모하기 위하여 1803년(순조 3)에 백련사에 건립된 영당을 그 전신으로 한다. 송시열이 기사환국으로 1689년(숙종 15)에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중 폭풍으로 성자포(남포)에서 배를 못타고 인근 백련사에 머물면서 강론하여 ‘종강지지(終講之地)’가 된 것이 이 서원의 건립배경이다. 1838년(헌종 4)에 주자상(朱子像)을 정향하고 송시열을 배향하였다.
강진남강사주자갈필목판은 남강사에 소장되어 있는데, 1809년 우암이 제주도로 유배갈 때의 승선지인 성자포 앞바다에 떠밀려 온 나무궤 안에 있던 ‘주자경재잠목판(朱子敬齋箴木板)’ 20매와 ‘대우수전(大禹手篆)’ 8매를 기본으로 한다. 당시 강진현감이 이를 감영에 보고하고 감영으로 옮기던 중 수송 인마(人馬)가 남강사 앞에서 전복되자, 하늘의 뜻이라 하여 목판을 사당에 소장하게 하였다. 1844년(헌종 10) 광주(光州)목사 조철영(趙撤永)이 쓴 「대우전주자필경재잠판기(大禹篆朱子筆敬齋箴板記)」을 보면 “명(明)이 망하고 중원이 혼란해지자 뜻있는 선비들이 성현의 수적(手蹟)이 오랑캐의 무리들에게 더럽혀질까 염려하여 궤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으나 남만제도(南蠻諸島)로 가지 않고 우리나라로 왔으니 이는 필시 신명의 보살핌이라”고 적고 있다.
현재 보존된 목판은 성자포에 표착된 원판 중 일부를 개판한 것으로, 1809년 표착한 ‘대우수전’과 ‘경재잠’은 9판이 소실되었고, 1844년에 조철영이 탑본모각(榻本模刻)하였으나 훼철 뒤 훼손되어 1904년 다시 모각하여 총 43판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