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떠돌이 예인집단에는 남사당패를 비롯하여 대광대패 · 솟대쟁이패 · 사당패 · 걸립패 · 중매구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그 규모나 내용으로 보아 남사당패가 첫손에 꼽힌다. 남사당패의 연원이나 역사적 형성과정을 밝히기에는 남아 있는 자료가 너무 빈약하다. 그러나 1900년대 초 이전에 서민사회에서 자연발생적 또는 자연발전적으로 생성된 민중놀이집단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같은 집단은 권력 주변에 기생하였던 지배층이 주관한 관노관원놀이[官奴官員戱]와는 달리 그 유지가 어려웠다. 유랑하는 민중놀이집단이 먼 옛날에도 있었음을 말해주는 기록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는 이미 신라에 인형놀이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고려사』의 폐행전(嬖幸傳) 전영보전(全英甫傳)과 『문헌통고(文獻通考)』 · 『지봉유설(芝峰類說)』 · 『허백당시집(虛白堂詩集)』 등에서도 역시 ‘괴뢰목우희(傀儡木偶戱)’나 그것을 놀았을 광대(廣大: 演戱者)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때 그때의 단편적인 기록에 불과한 것으로 유랑 예인집단의 연원까지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민중의 이해와는 거의 대립적인 입장에서 기술된 문헌들이므로 한결같이 패속패륜집단(敗俗悖倫集團)으로 몰아붙이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 내용상의 분류조차 못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그 밖의 사서류(史書類)나 문집이나 잡기 등에서도 시종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봉건적 질곡 속에서 싹튼 민중의 자생적 연희집단에 대한 지배계층의 도식적 평가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남사당패는 ‘꼭두쇠(우두머리, 모갑이)’를 정점으로 풍물(농악) · 버나(대접돌리기) · 살판(땅재주) · 어름(줄타기) · 덧뵈기(탈놀음) · 덜미(꼭두각시놀음) 등 여섯 가지 놀이를 갖고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만 제공받게 되면 마을의 큰 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꼭두쇠란 명실공히 패거리의 대내외적인 책임을 지는 우두머리로, 그의 능력에 따라 단원이 모여들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였다. 조직은 일사불란하여 오히려 획일적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엄격하였다.
50명 내외의 많은 인원을 필요로 하는 남사당패는, 그 충원방법으로 빈곤한 농가의 어린이를 응낙(실은 먹여 살릴 수 없어 내주는 것이지만)을 얻어 받아들였거나 아니면 가출아 등이 대상이 되었고, 어떠한 경우는 유괴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꼭두쇠는 한 패거리에 한 사람이지만 그를 보좌하는 ‘곰뱅이쇠’는 패거리의 규모에 따라 두 사람일 수도 있었다. 곰뱅이란 남사당패의 은어로 ‘허가(許可)’라는 뜻인데, 어느 마을에 들어갔을 때, 놀이판을 벌여도 좋다는 사전승낙을 받는 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말한다.
곰뱅이쇠가 둘일 경우, 그 하나는 패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인 먹는 문제를 맡는, 즉 남사당패 은어로 ‘밥’이라는 뜻인 ‘글’의 임무를 맡았다. 뜬쇠란 꼭두쇠 밑으로, 각 연희 분야의 선임자이다.
뜬쇠들은 그들이 노는 놀이의 규모에 따라 해당놀이에 예능을 익힌 몇 사람씩의 ‘가열(보통기능자)’을 두게 되고 가열 밑에 초입자인 ‘삐리’를 두게 된다.
삐리는 꼭두쇠들의 판별에 의하여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놀이에 배속되어 잔심부름부터 시작하여 한 가지씩의 재주를 익혀 가열이 되며, 이들이 가열이 되기까지는 여장(女裝)을 하는 것이 상례였던 점이 특이하다.
또, 이들은 숫동모[男]와 암동모[女]라는 이름으로 남색조직(男色組織)을 이루고 있었다. 예외도 있었지만 숫동모는 가열 이상이며, 암동모는 삐리들이 감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삐리는 거의 전원이 암동모 구실을 하였다.
남사당 패거리 사이에는 이 삐리의 쟁탈전이 치열하였는데, 그것은 자기 몫의 암동모를 갖기 위한 방편도 되겠지만 그보다도 반반한 삐리가 많은 패거리가 일반적으로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남사당패의 은거지로 밝혀진 곳은 경기도 안성 · 진위, 충청남도 당진 · 회덕, 전라남도 강진 · 구례, 경상남도 진주 · 남해, 북쪽으로는 황해도 송화 · 은율 등지인데, 그 곳에서는 놀이가 거의 없는 겨울철에 동면을 겸하여서 삐리들에게 기예를 가르쳤다고 한다.
남사당은 서민들에게는 환영을 받았지만 지배층에게는 심한 혐시(嫌猜: 싫어서 꺼리고 의심함)와 수모의 대상이어서 마음대로 어느 마을이나 출입할 수가 없었다.
두레가 있는 시기에는 그 마을의 두레기가 들판에서 나부낄 때, 그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 같은 데서 그들의 당기(黨旗, 또는 용당기라고도 함)와 영기(令旗)를 흔들며, 흥겹게 풍물을 울리고 동니[舞童]를 받는 등 온갖 재주를 보여준다.
이것을 본 마을사람들이 지주의 사전 양해를 얻어 패거리를 끌어들이기로 결정되면 두레기를 흔들어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두레가 없을 경우에는 역시 마을에서 제일 잘 보이는 언덕배기에서 온갖 재주를 보여주면서, 한편으로 곰뱅이쇠 혼자 마을로 들어가 그 마을의 최고 권력자를 찾아 자기들의 놀이를 보아줄 것을 간청한다. 만약, 마을에 들어와도 좋다는 허가가 나면 의기양양하게 길군악을 울리며 마을로 들어서다.
대개의 경우 열에 일곱은 곰뱅이가 트지 않았다고, 옛 남사당패 연희자 정일파(鄭一波) · 남형우(南亨祐) · 양도일(梁道一) · 최성구(崔聖九) 등은 회고한 바 있다. 남사당놀이가 벌어지려면 날이 어두워진 다음, 놀이판으로 잡은 넓은 마당에 횃불을 밝힌다.
한편으로 풍물잡이들이 길군악을 울리며 마을의 크고 작은 골목을 돌면 동네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 행렬을 이루면서 길놀이가 된다. 이 때에 놀이판에는 사전에 줄이 매어지고 덜미의 포장과 버나 · 살판 · 덧뵈기 등을 연희할 마당 한가운데에 큰 멍석 5∼6장이 깔린다.
여기서 벌이는 남사당놀이 가운데 얼른(요술) 등의 종목은 이미 없어졌고, 남은 종목은 풍물 · 버나 · 살판 · 어름 · 덧뵈기 · 덜미의 여섯 종목이다.
채록본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개 두마당 일곱거리로서, 즉 박첨지마당(박첨지유람거리 · 피조리거리 · 꼭두각시거리 · 이시미거리), 평안감사마당(매사냥거리 · 상여거리 · 절짓고 허는 거리) 등이다. 꼭두각시놀음은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으며, 1988년 남사당놀이로 명칭이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