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경상남도 함양군, 서쪽은 순창군, 남쪽은 전라남도 구례군과 곡성군, 북쪽은 임실군 · 장수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7°11′∼127°40′, 북위 35°18′∼35°33′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752.20㎢이고 인구는 8만 4856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15개 면, 7개 행정동(23개 법정동), 334개 행정리(157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도통동에 있다.
동쪽 · 북동쪽 · 남동쪽이 소백산맥에 속하는 높이 1,000m 이상의 산지이고, 남서쪽 순창군과의 접경지대는 500∼700m의 산지로 되어 있다.
소백산맥의 주 능선인 지리산지에는 삼봉산(三峰山, 1,187m) · 명선봉(明善峰, 1,586m) · 반야봉(盤若峰, 1,734m) · 노고단(老姑壇, 1,507m) · 만복대(萬福臺, 1,433m) · 고리봉(環峰, 1,304m) · 세걸산(世傑山, 1,207m) · 덕두산(德頭山, 1,150m) 등 높은 산들이 많다.
그 밖의 지역에는 이보다 낮은 천황산(天皇山, 910m) · 고남산(高南山, 846m) · 견두산(犬頭山, 775m) · 황산(荒山, 697m) · 문덕봉(門德峰, 590m) · 노적봉(露積峰, 568m) 등의 산들이 있다. 산지 사이에는 분지가 발달해 있는데 산동면 · 이백면 · 주천면을 경계로 동쪽의 운봉분지와 서쪽의 오수분지 · 남원분지로 구분된다.
운봉읍 · 인월면 · 아영면 일대인 운봉분지는 고원상 분지로 해발고도 500m 내외이다. 북서부의 덕과면 · 보절면 · 사매면과 임실군의 남동부 일대인 오수분지와 중앙과 남서부의 대산면 · 주생면 · 금지면 · 송동면 · 이백면 · 주천면 · 수지면과 동(洞)지역 일대인 남원분지는 높이 100m 내외이다.
오수분지와 남원분지는 높이 250m 내외의 낮은 구릉으로 분리되어 있어 대체로 오수 · 남원분지로 구분한다. 이들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지는 편마암류로 이루어져 있으나 분지는 화강암류로 이루어져 있어서 암석의 차별침식에 의해 분지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남원분지를 흐르는 요천(蓼川)은 장수군에서 발원해 북동부 산동면으로 흘러서 시의 중앙부를 지나 남서부의 금지면에서 섬진강으로 흘러든 뒤 전라남도 곡성군으로 흐르고, 오수분지를 흐르는 오수천의 소지류들은 임실군으로 흐르면서 연안에 소규모의 충적평야를 형성한다. 오수 · 남원분지를 흐르는 이들 하천은 섬진강의 지류들이다.
운봉읍에서 발원한 광천은 운봉분지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나면서 소규모의 충적지를 만들고, 지리산지에서 발원한 만수천과 산내면에서 합류해 경상남도에서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으로 흘러든다.
남부내륙형 기후구에 속하지만 지형이 분지 · 고원상분지 · 고산지대로 이루어져 있어 지역에 따라서 큰 차이를 보인다. 연평균기온 12℃, 1월 평균기온 -1.7℃, 8월 평균기온 26℃이며, 연강수량은 1,200㎜이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은 발견된 바 없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역에 속했으며 마한 54개국 중 고랍국(古臘國)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리산을 경계로 진한과 변한의 국경지역에 위치한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이와 관련해 마한이 달궁(達宮)지방에 별궁을 두고 정장군(鄭將軍)과 황장군(黃將軍)을 파견해 진한 · 변한의 침략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역에 속했는데, 기원후 15년(온조왕 33) 고룡군(古龍郡)이라 했다가 196년(초고왕 31)에 대방군(帶方郡)으로 개칭했으나, 평안도지방에 한사군(漢四郡)의 대방군이 설치되자 220년(구수왕 7)에 남대방군(南帶方郡)으로 또 바꾸었다.
660년(무열왕 7)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당하자, 이 지방에 대방도독부(帶方都督府)를 두고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를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使) 겸 도독으로 삼았다.
685년(신문왕 5) 전국에 5소경(五小京)을 설치할 때 그 중 하나인 남원경(南原京)이 설치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 대방을 남원이라 고쳤다. 828년(흥덕왕 3)에는 증각대사(證覺大師)가 실상사(實相寺)를 창건했고, 875년(헌강왕 1)에는 도선(道詵)이 선원사(禪院寺)를 창건하였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년(태조 23) 남원부(南原府)로 개칭되었고, 현종 때 지방제도 정비를 거쳐 임실(任實) · 순창(淳昌) 등 2개의 속군(屬郡)과 장계(長溪) · 적성(赤城) · 거령(居寧) · 구고(九皐) · 운봉(雲峰) · 장수(長水) · 구례(求禮) 등 7개의 속현(屬縣)을 관할하는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명종 때에는 공주에서 망이(亡伊)가 난을 일으키자 남원 · 완주 등 호남 일대에서 이에 호응했는데, 그 때 윤위(尹威)는 남원지방의 반란군을 평정한 공으로 남원부백(南原府伯)이 되었으며, 그가 남원윤씨의 시조이다.
1310년(충선왕 2) 대방군으로 환원했다가 1360년(공민왕 9) 다시 남원부로 복구되었다. 1379년(우왕 5) 왜구가 경상도지방을 노략한 뒤 함양을 거쳐 운봉의 인월리에 주둔하였다. 그 때 삼도순찰사(三道巡察使)이던 이성계(李成桂)는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운봉 황산에서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사살하는 등 황산대첩(荒山大捷)]을 거두었다.
1410년(태종 10) 대복사 부근에 남원향교가 창건되었다. 1413년(태종 13) 남원도호부로 되어 1군 18현을 관할하였다. 1418년 황희(黃喜)가 세자책봉에 이견이 있어 남원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때 광통루(廣通樓)를 세웠으며, 1444년(세종 26) 전라도관찰사였던 정인지에 의해서 광한루로 개칭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남원도호부의 호수는 1,300호, 인구는 4,912명이었다. 세조 때 진관체제가 성립됨에 따라 남원에도 진관이 설치되었으며, 남원부사가 첨절제사를 겸임해 담양 · 순창 등을 거느렸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쳐들어오자 의병장 양대박(梁大樸)은 운암에서, 조경남(趙慶南)은 운봉의 팔량치(八良峙)에서 각각 왜군을 대파하였다. 또한 임진왜란중에 변사정(邊士貞)은 교룡산성의 수성장이 되어 산성을 크게 수축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남원성이 함락되었으며, 그 때 용성관 · 향교 · 만복사 · 광한루 등이 모두 불탔다.
1654년(효종 5) 남원에 전라좌영을 설치했으며, 1739년(영조 15) 찬규(攢揆)의 반란으로 인해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750년 다시 남원부로 복구되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김개남(金開男)은 남원성을 점령하고 교룡산성을 거점으로 활약하다가 여원치(女院峙)에서 관군에게 패하였다. 1896년 지방관제 개편 때에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개편되었는데, 그 때 전라남도의 관찰부를 남원에 두었다. 그러나 이듬해 전라북도에 편입됨에 따라 관찰부는 광주로 옮겨졌다.
1906년에는 의병장 양한규(梁漢奎)가 헌병대를 습격하다가 전사하였다. 1914년 남원도호부가 폐지되었고 운봉군을 통합해 남원군이 되었다. 이 때 남원군은 19개 면을 관할했으며, 인구는 약 9만2000여 명에 이르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4월 3일 이석기(李奭器)의 영도하에 많은 면민들이 만세운동에 참가했으며, 그 뒤 5월까지 19차례의 시위가 전개되었다.
1931년 남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듬해 전주∼남원간의 철도가 개통되었다. 근대의 인물로는 이 지방 3·1운동 선구자인 이석기를 비롯해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백용성(白龍城)과 일제의 침략에 대해 자결로 항거한 이태현(李太鉉), 통감부를 습격했던 박석규(朴錫奎) 등이 있다.
1950년 6·25 때 7월 24일 공산군에게 점령당했다가 9월 28일 유엔군의 진주로 다시 수복되었다. 이 때 각급 관청과 학교 · 교회 · 주택 등이 불탔으며, 9·28 수복 후에는 패주하던 공산군이 지리산으로 들어가 인근 주민을 약탈하는 등 그 피해가 컸다. 그 때 애국청년 · 학생들이 경찰을 도와 공비 토벌에 참가하였다.
1956년 왕치면이 남원읍에 폐합되었으며, 1981년 남원읍이 시로 승격되었고 남원군과 분리되어 별도의 행정구역을 이루었다. 1985년 7월 대강면 수홍출장소를 폐지, 1990년 4월 송동면 양평리 일부가 금지면 상신리에 편입되었다. 1995년 도농통합에 따라 남원군과 남원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남원시가 되었으며, 같은 해 3월에 운봉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98년 5월 1일에는 동면이 인월면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2일에는 쌍교동이 죽항동과 금교동으로, 용정동이 향교동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선사시대유적은 아영면 청계리의 고인돌을 비롯해 석곽묘 · 옹관묘 등이 산재한 남원유곡리 및 두락리고분군(전라북도 기념물, 1973년 지정)이 있다.
성곽으로는 당나라 유인궤가 처음 쌓았다고 전하지만, 실제 신라 삼국통일 후 신문왕대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남원읍성(사적, 1982년 지정)과 조선 초기에 축성되어 정유재란 때 처영 등에 의해 개축된 교룡산성(전라북도 기념물, 1973년 지정)과 용투산성지(龍鬪山城址), 대산면 신계리성터가 있고 주생면 내동리, 운봉읍 장교리 · 가산리 등에 성터가 남아 있다.
봉수대로는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던 봉화산봉수대가 아영면에 있는데, 이는 사두봉 · 비봉산 · 대불리 봉수대를 거쳐 탄치로 연결되었다.
불교 유산으로는 왕정동의 만복사지(사적, 1991년 지정) · 만복사지 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만복사지 석좌(보물, 1963년 지정) · 만복사지 당간지주(보물, 1963년 지정), 도통동의 선원사 대웅전 · 선원사 철조여래좌상(보물, 1965년 지정) · 선원사 동종 · 선원사 약사전, 산곡동의 선국사 대웅전 · 선국사대북(전라북도 민속자료, 1974년 지정), 왕정동의 대복사동종, 대복사 극락전, 노암동의 덕음암 석불좌상 · 미륵암석불, 산내면 입석리의 남원 실상사(사적, 1984년 지정) ·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 산내면 대정리의 실상사백장암석등(보물, 1963년 지정), 입석리의 실상사 수철화상탑(보물, 1963년 지정) · 실상사 수철화상탑비(보물, 1963년 지정) · 실상사 석등(보물, 1963년 지정) · 실상사 승탑(보물, 1963년 지정) ·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실상사 증각대사탑(보물, 1963년 지정) · 실상사 증각대사탑비(보물, 1963년 지정) · 실상사 철제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 · 실상사 극락전 · 백장암청동은입사향로(보물, 1965년 지정), 주천면 용담리의 용담사지 석조여래입상(보물, 1963년 지정) · 용담사칠층석탑, 대산면의 남원신계리마애여래좌상(보물, 1965년 지정), 주생면의 지당리석불입상 · 낙동리석조여래입상, 신촌동의 심경암석불좌상, 실상사위토개량성책이 있다. 선원사 대웅전은, 대복사 극락전, 덕음암 석불좌상, 미륵암석불은 전부 1984년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선원사 동종은 1973년, 선원사 약사전은 1986년, 선국사 대웅전은 1985년, 대복사동종은 1973년, 실상사 극락전은 1974년, 용담사칠층석탑은 1971년, 주생면의 지당리석불입상은 1974년, 낙동리석조여래입상은 1974년, 심경암석불좌상은 1974년, 실상사위토개량성책은 1979년에 전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사찰로는 실상사 · 선원사 · 선국사 · 귀정사(歸政寺) · 용담사 · 주지암(住持庵) 등이 있다.
유교 유산으로는 1410년(태종 10)에 창건되어 1935년에 현 위치에 재건된 향교동의 남원향교대성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 운봉읍 산덕리의 운봉향교(雲峰鄕校), 도통동의 창주서원(滄洲書院), 주생면 영천리의 유천서원(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과 상동리의 용장서원(龍章書院), 대강면 풍산리의 풍계서원(楓溪書院), 덕과면 만도리의 호암서원(湖巖書院), 사매면 서도리의 노봉서원(露峯書院)을 비롯해 석봉서원(石峰書院) · 두곡서원(杜谷書院) ·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이 있다.
또한 사우로는 충렬사(忠烈祠) · 예산사(禮山祠) · 용암사(龍巖祠) · 정충사(旌忠祠) · 구천사(龜川祠) · 민충사(愍忠祠) · 십로사(十老祠) · 유애묘(遺愛廟) · 춘향사(春香祠) · 금남재(錦南齋), 그리고 관우(關羽)를 제사 지내는 남원관왕묘(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 등이 있다.
누정으로는 1419년(세종 1) 황희(黃喜)가 세웠던 광통루를 정인지(鄭麟趾)가 새롭게 했다고 하는 광한루(보물, 1963년 지정)가 있고, 광한루와 방장산(方丈山) · 봉래도(蓬萊島) · 영주각(瀛洲各) 등이 있는 경내를 광한루원(사적, 1983년 지정)이라 해 보호하고 있다.
무형유산으로는 백동연죽장(중요무형문화재, 1980년 지정)이 있다. 백동연죽장은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천연기념물로는 보절면 진기리에 남원 진기리 느티나무(천연기념물, 1982년 지정)가 있으며, 노거수로는 송동면의 은행나무를 비롯해 이백면 내동리의 은행나무, 덕과면 사율리의 사곡송림(沙谷松林), 노유재(露濡齋) 은행나무 등이 있다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는 산내면의 남원 실상사 석장승(중요민속자료, 1969년 지정), 운봉읍의 서천리 당산(중요민속자료, 1970년 지정), 수지면 호곡리의 남원 몽심재 고택(중요민속자료, 1984년 지정) 이 밖에도 1380년(우왕 6) 삼도순찰사 이성계가 경상도지방에서 운봉으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맞이해 격파한 기념비가 있었던 황산대첩비지(사적, 1963년 지정)가 운봉읍 화수리에 있다. 또한 정유재란 때 왜적들과 싸우다가 순국한 이들의 무덤인 만인의총(사적, 1981년 지정), 조선 태조의 전패를 모셔놓은 객사였던 용성관(龍城館)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1410년(태종 10)에 대산면 대곡리에 창건되었다가 1443년(세종 25) 지금의 향교동으로 이전되고 1599년(선조 32)에 중건되었던 남원향교가 있다. 이 향교는 현존하는 전국 향교 가운데 강릉향교 다음 가는 시설과 규모를 갖춘 웅장한 향교이다.
운봉향교도 1410년에 창건되어 1640년(인조 18)에 운봉읍 산덕리로 이전되었다. 또한 1579년에 설립되어 1600년에 사액된 도통동의 창주서원과 1612년(광해군 4) 향교동에 세워져 1653년 사액되었다가 1879년(고종 16)에 재건된 충렬사, 1639년에 창설해 1697년(숙종 23)에 사액된 운봉서원, 1692년 산동면 목리에 세워진 요계서원(蓼溪書院), 1635년 운봉읍에 설립된 용암서원, 1766년(영조 42) 송동면에 설립된 두곡서원, 그리고 1837년(헌종 3) 주생면에 건립된 이호서원(伊湖書院) 등은 철폐될 때까지 많은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또한 1830년(순조 30)에 설립된 유천서원(楡川書院), 1856년(철종 7)에 설립된 구천사, 1860년 설립된 예산사, 1708년에 설립된 정충사, 1856년에 설립된 환봉사(環峰祠), 1772년에 설립된 두남사(杜南祠), 1692년에 설립된 고암사(高巖祠) 등이 있었으며, 1726년(영조 2)에 설립된 고암재(高巖齋)와 지당서당(池塘書堂) · 돈학당(暾學堂)의 서당과 1890년(고종 27) 남성장학회(南星奬學會)라는 관서당(官書堂)이 설립되어 초등교육을 담당하였다.
근대교육기관으로 1907년에 용성관 자리에 남원공립보통학교(지금의 용성초등학교)가 최초로 설립되었고, 이 해에 박봉양(朴鳳陽)이 세운 사립만성학교(私立晩成學校)는 1912년에 운봉사립보통학교(雲峰私立普通學校)로 개편되어 사립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1910년 일본인들이 그들 자녀를 교육할 목적으로 일본학교조합을 창설하고 설립한 일본인조합립(日本人組合立)남원심상소학교는 현재 남원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중등학교로는 1946년 남원초급중학교가 개교되었고, 1955년 남원고등학교가 개교되어 이 고장의 중등교육을 담당하여 왔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27개교, 중학교 14개교, 고등학교 9개교, 특수학교 1개교가 있으며, 대학은 서남대학교가 있었으나 2018년 2월 폐교하였다.
1921년 광한루에 설립되었던 남원권번(南原券番)을 모태로 해방 후 설립된 남원국악원은 국악예술연구와 예술인 양성에 힘써오다가 1991년 국립민속국악원으로 승격되어 학생은 물론 일반 시민에까지 각종의 국악연주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어 민족 전통음악 계승에 이바지하고 있다.
남원문화원은 해마다 음력 4월 8일에 춘향의 정절을 기리는 춘향제(春香祭) 등의 문화행사를 주관해 이 지방 문화의 진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95년에 어현동 관광단지 내에 설립된 춘향문화예술회관은 남원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의 전당이 되고 있다.
이 고장의 민속놀이로 삼동굿놀이와 운봉줄다리기 · 용마놀이가 있다. 삼동굿놀이는 보절면 괴양리의 양촌 · 음촌 · 개양의 세 마을에서 매년 음력 7월 15일 백중날에 행하는 민속놀이이다. 이 놀이는 풍수설(風水說)의 명당신앙(明堂信仰)과 산신신앙이 복합되어 있는 민속놀이로서, 이 마을에서 출생하는 어린이들의 생장과 출세를 기원함과 동시에 마을 전체의 양재기풍(禳災祈豐)을 위한 축제로서 행한다.
이 놀이가 시작된 정확한 시기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구전으로는 고려시대부터 전해진 것이라 한다. 이 놀이를 하게 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괴양리 뒷산이 계룡산인데 이 산에 연계되는 장태봉과 회산천(回山川)이 만나는 곳에 영계욕전(嬰鷄浴田)이라는 명당이 있다.
이 명당이 발음(發蔭)되어 효험을 보게 되면 이 마을에서 거주하는 장씨 · 박씨 · 이씨의 삼성을 가진 어린이 중에서 뒷날 어른이 되었을 때 삼정승(三政丞)이 나오게 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 근처에 닭과 상극인 지네의 형상이 꿈틀거리고 있어 영계(어린 닭)의 발음하는 세력을 저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네의 방해를 막아내는 방법으로서 삼동굿놀이를 행하면 계룡산과 영계명당의 정기가 어린이들의 생기(生氣)를 도와주게 되고 지네의 살기(殺氣)가 없어진다고 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삼동굿놀이는 양촌 · 음촌 · 개양의 세 마을에 각각 1명씩의 춤 잘 추는 어린이를 무동(舞童)으로 선발해, 이 무동을 어깨 위에 올려놓고 춤을 추게 하는 ‘춤받이’의 구실이 이 놀이의 주역이 된다. 이 세 어린이는 이 마을에서 장차 나오게 될 정승의 상징으로 선출되는 것이다.
이 놀이 이전에 마을공동제인 당산제가 선행된다. 놀이를 행할 보름날 아침에 세 마을이 각각 농기(農旗)와 영기(令旗)를 앞세우고 그뒤에 무동이 춤받이의 어깨에 올라서서 춤을 추면서 따라간다.
그 뒤에 농악대가 길굿을 치면서 따르고 그 뒤에 남녀 마을사람들이 열을 지어 따라간다. 이 때 당산에는 미리 정결한 사람으로 선정된 유사(有司)에 의해 마련된 제수가 차려지고 마을의 장로가 제관이 되어 연중 재앙이 없고 풍년이 되어 평화스러운 생활을 하도록 신조(神助)가 있게 하라는 축문을 읽으면서 술을 올리고 소지(燒紙)를 올리는 순으로 의식을 행한다.
제가 끝나면 세 마을 주민들이 양촌마을의 공동우물에 나아가 농악을 치면서 우물제를 지내고 나서, 주민들이 양촌마을 앞 광장에 다시 모여 순산을 비는 무당굿을 행하는데, 미역과 쌀 · 정화수 등의 제물을 상 위에 차려놓고 꽹과리를 치면서 소원을 빈다.
이 때 춤받이는 무동을 두 팔로 들어 자기 몸의 좌우로 돌리다가 두 다리 사이로 나오게 한다. 이는 아기를 낳을 때에 산고의 진통을 하다가 순산하는 시늉을 내는 것이다. 이 과정이 끝나면 무동은 춤받이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춤을 한참 추다가 머리에 쓴 수건을 벗고 입신양명을 자축하는 만세를 부른다.
이 때 세 마을의 부인들은 길게 늘어서서 뒷사람이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몸을 구부려 대열을 이루어 마치 지네가 꿈틀거리는 형상을 취하고 세 명의 무동은 닭벼슬모양으로 된 관을 쓰고 「지네밟기노래」를 부르면서 걸어간다.
「지네밟기노래」는 다음과 같다. “삼교정의 우리농민 지네밟기 힘을 쓰세/어럴럴 지네밟세 일심으로 지네밟세/삼강오륜 예의촌은 삼교정이 이 아닌가/어럴럴 지네밟세 일심으로 지네밟세/삼태화백 계룡산에 영계욕전 대명당은/어럴럴 지네밟세 일심으로 지네밟세/삼정승이 나온다고 자고지금 전해왔네/어럴럴 지네밟세 일심으로 지네밟세.”
놀이가 끝나면 세 마을의 농악이 합세하고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즐겁게 논다. 이 놀이는 1982년 10월 광주에서 열린 제23회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바 있다.
운봉줄다리기는 운봉에서 오랫동안 전해오는 민속놀이인데,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날 행한다. 처음에는 이 곳에 세거하는 운봉박씨들이 친목과 단합을 목적으로 시작했는데, 뒤에 운봉지방민의 놀이로 발전되었다.
운봉박씨들의 줄다리기를 소개하면, 놀이에 앞서 지난해의 섣달(12월)에 짚을 100단 정도 거두어 큰 동아줄을 만든다. 그 줄의 길이는 운봉교(雲峰橋)에서부터 시장을 거쳐 장대(將臺)의 옛터까지 닿을 정도로 자그마치 500m가 넘는다.
원줄의 굵기는 어른의 한아름이 되게 하고, 이 원줄에서 중간줄이 갈라지고 중간줄에 작은 애기줄을 무수히 잇는데, 이 새끼줄은 어른이 한 주먹으로 쥘 정도이다. 이렇게 해 동아줄이 완성되면 운봉박씨들이 살고 있는 위치에 따라 동편박씨와 서편박씨로 나뉘는데, 이 때 양편의 박씨들은 운봉읍내뿐만 아니라 운봉관내 4개 면의 박씨는 물론 멀리 남원 · 함양 · 진주까지 연락해 운봉박씨들의 연고자면 모두 동원되었다고 한다.
줄다리기하는 장정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수백 통의 술을 현장에 가져다놓고 자기편에게 적당히 술을 권한다. 술을 마실 때는 동편 · 서편의 구별을 짓지 않는다. 경기는 줄의 한가운데 아름드리 큰 목나무를 꽂아 표준을 삼은 다음 양편에서 한 사람씩 심판이 나오고 모여든 남녀노소의 응원을 받으며 시작된다.
한창 힘을 주다가 목이 마르면 자유로이 술을 마신다. 그런데 참여인원을 제한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장정을 동원하는 쪽이 이기게 마련이었다. 줄다리기의 승부가 결정되면 지는 쪽에서 놀이에 쓰인 술값을 부담하는데, 대개 한 사람 또는 몇몇 유지가 공동으로 부담해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특색이었다. 현재는 마을대항행사로서 운봉주민이 동서 두 진영으로 나뉘어 소형의 줄로 놀이를 행한다.
마을 전체의 동제로는 당산제와 가물 때 비를 내려주기를 기원하는 기우제 등이 있다. 당산제는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당산에서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고 평화와 풍년을 기원하는 공동제이다. 남원지방은 산간부에 위치하고 있어 전통적인 민간신앙이 다른 지역에 비해 최근까지 전승되었다.
1960년대까지 대부분의 마을에 당산이 설치되어 있어서 매년 정월보름에 당산제를 지냈다. 만일 마을에 상사(喪事) 등의 부정한 일이 있을 때는 2월 중에 길일을 택해 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주천면 용궁(龍宮)마을에서 행하는 당산제는 가장 유래가 깊고 규모가 성대하다.
용궁마을은 지리산 줄기의 서쪽으로 뻗어내린 영제봉(靈帝峰) 앞에 1천 년 전 신라 때 형성된 마을로서, 이 마을 주민들은 영제봉산신을 신앙하는 속신이 전승되어 왔기 때문에 마을 수호신으로 숭배하는 당산신을 영제봉산신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에는 마을의 동서 양단(兩端)에 두 개의 당산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동쪽 당산을 윗당산이라 하고 서쪽 당산을 아랫당산이라 하는데, 윗당산은 할아버지당산이라 하고 아랫당산은 할머니당산이라 한다. 당산제를 지내고 나면 마을에 괴질 등의 병이 없고 가축이 잘 자라게 되며 재앙이 없고 풍년이 든다는 것이다.
제사를 차리는 유사는 생기 · 복덕을 가리는 점술에 의해 보름날의 일진에 비추어 생기에 합치하는 정결한 부부를 선택한다. 이들은 15일 이상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으며 매일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고 마을의 지정된 우물에서 정화수를 길어 집안 후원에서 축원을 한다. 제수의 구입 및 준비도 모두 이들이 한다.
정해진 날에 유사는 동서의 두 당산에 제물을 차리는데, 반드시 삼색과일과 나물, 그리고 소머리나 돼지머리 날것을 준비한다. 제사는 마을 노인들이 제관이 되어 유교식으로 고축을 하고 삼헌(三獻)을 한다. 전에는 제사가 끝나면 돼지머리 등 제물을 땅에 묻었고 이를 산신묘(山神墓)라고 불렀다. 그러나 요즈음은 제사가 끝나면 농악을 치고 가무도 즐기면서 술과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이 제사비용은 옛날에는 제사답(祭祀畓)으로 조리배미[明大師] · 장구배미[王答]라는 논이 따로 있어서 이곳에서 나는 곡식으로 경비를 충당하였으나, 요즈음은 마을사람들이 내는 성미(誠米)와 성금을 비용으로 쓴다.
또한 이 지방에서는 농사철에 가뭄이 극심하면 명산을 택해 기우제를 지내는데, 이름난 곳은 대강면에 있는 고리봉과 이백면의 주지봉이다. 고리봉의 기우제는 이 곳 대강면과 금지면의 주민들이 행사하던 것인데, 8·15광복 후에는 산 밑 서석막마을에 거주하는 정결한 여인을 주제자(主祭者)로 선정하였다.
주제자는 목욕재계한 다음 산 위에 삼색과일과 돼지머리를 제물로 차려놓고 짚단과 섭(나무) 등으로 큰불을 놓는다. 그리고 농악을 치면서 제사를 올린 다음 삼색과일은 그 자리에서 사방으로 고루 던지고 돼지머리는 땅에 묻는다. 기우제를 지내고 난 뒤에는 실제 효험을 본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
고리봉이 명산이라 해 정상에 몰래 산소를 쓰는 이가 있는데, 밀장(密葬)이 들면 반드시 한해가 든다고 전한다. 1962년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산 위에 밀장을 쓴 것을 발견해 아랫마을 여인들이 밀장을 파버렸는데, 이에 가담했던 한 여인이 자기의 증조부묘라는 것을 뒤에 알게 되어 속죄의 눈물을 흘리고 다시 그 자리에 떼를 입혔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표가 날 정도로 매우 푸르다고 한다.
주지봉은 지리산의 줄기가 이곳에 멈춘 영봉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원에 영험이 많다고 해 주지봉 밑에 세워져 있는 주지암도 1696년(숙종 25) 남원부사 김세평(金世平)이 지방민의 소원을 이루라는 뜻에서 세워준 것으로 현재의 절은 세 번째 복원한 것이라 한다.
정상에는 신선들이 내려와서 바둑을 두었다는 바둑판모양의 네모난 암석이 있다. 여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틀림없이 비가 내리는 영험이 있다 해 가뭄이 심하면 남원 외 지방민이 여기에 와서 기우제를 지내는데, 일명 기우단이라고도 한다.
이 곳의 기우제는 남자들이 행하는데, 형식은 일반적인 기우제와 다름이 없다. 근래에는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고, 또 극심한 가뭄이 없기 때문에 1973년 이후부터는 기우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한편 용정동에 있는 사직단과 향교동의 여단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이 고장에는 지명유래담, 자연물에 얽힌 설화, 사찰 관련설화, 역사적 인물에 관련된 설화가 많이 전한다. 「호성암전설」은 옛날에 어느 도승이 남원의 산천을 구경하면서 아름다운 풍경에 심취해 있을 때 입에 짐승뼈가 박힌 호랑이가 다가와 구원을 요청하니 도승이 뼈를 빼내준 은덕으로 호랑이가 아가씨를 물고 왔다.
이러한 인연으로 아가씨 집으로 부터 많은 시주를 받아 호랑이의 입에 박힌 짐승뼈를 제거해 준 장소에 암자를 창건했다고 하는 전설이다.
「바람바위전설」은 보절면 뒷산에 2층으로 된 바람바위가 있어 해마다 강풍에 농작물이 쓰러져 타격을 입으니, 박영호라는 사람이 주민 300여 명을 이끌고 바람바위를 깨뜨리려고 올라갔으나 뇌성벽력에 놀라 바위를 깨뜨리지 못하고 내려왔다는 설화이다.
「호석전설」은 호두산(虎頭山)에서 개들이 짖을 때마다 남원부에 호환이 일어나는 등 재앙과 괴변이 발생하자, 호환을 막기 위해 호두산을 견두산(犬頭山)이라 개명해 호환을 없앴다는 전설이다.
「일신현전설」은 영조 15년 경상도 두메산골에서 반란사건이 일어나 민심을 크게 현혹시킨 찬규가 남원부 사람인 까닭에 남원부가 일신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일신현의 현감으로 부임한 홍익삼의 상소로 환원되어 다시 남원부로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산신바위전설」은 하늘에서 찬란한 오색구름을 타고 선인들이 내려올 때 아름다운 산내천에서 용들이 꿈틀거리고 나와 선녀들과 어울리며 산신바위에서 춤추고 놀았다는 전설이다.
「귀정사의 삼일왕정전설」은 백제 때 무령왕이 3일간 만행사에 머물러 국정을 살피고 돌아갔다 해 이로부터 사찰명을 귀정사라 고쳐 불렀다고 하는 전설이다. 이백면 초천리 무동산(無童山)에는 돼지명당에 얽힌 설화가 있다. 옛날 초산리에는 50명이 넘는 대가족이 사는 대가집이 있었는데, 다른 이웃집은 놓아두고 유독 이 대가집에만 밤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식구들을 차례로 잡아먹는 바람에 끝내는 열여덟 살의 딸 하나만 남게 되었다.
그녀는 호환을 각오하고 모든 것을 체념했으나 뒷사람의 희생을 막기 위해 천지신명에게 기도하기로 하였다. 그녀는 연지샘에 가서 목욕하고 연지를 바르고 비녀꼭지에 가서 비녀를 꽂고 거울바위에 가서 마지막 단장을 해 유부녀로 가장하고 호랑이를 기다렸으나 호랑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천지신명에게 감사하고 백일기도를 시작했는데, 마지막날 옥황상제의 아들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꿈을 꾸었다. 이 때부터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다. 처녀가 아이를 낳은 부끄러움에 옥동자를 안고 행장을 차려 무동산의 암굴에 들어가 살려고 하였다. 같은 날 한 쌍의 산돼지가 암굴에 들어와 같이 기거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때까지 마을에 빈번하게 일어났던 도적 · 질병 등의 재난이 사라지고 아이는 장사로 자라났는데, 이 산에 묘를 쓰면 장군을 낳는다고 해 묘터로 썼다 한다. 또 아이가 미인봉에 가서 선녀들과 어울려 놀았으므로 산이름도 무동산이라 했다고 전한다.
산동면의 귀정사는 여러 설화가 전하는 곳이다. 귀정사는 전성기에는 불당이 만행산일대를 메웠고 승려가 200명이 넘을 정도의 대규모 사원이었다. 따라서 물자가 풍부해 거두어들인 쌀을 그 해에 못다 먹고 묵히므로 해마다 승려들은 묵은 쌀밥을 먹어야만 되었다.
벌레먹은 묵은 쌀을 먹기에 진력이 난 승려들은 불평이 대단했는데, 하루는 도사가 나타나 “대웅전을 뜰 아래로 한 단 내려 지으면 새 쌀을 먹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신이 난 승려들은 당장 대웅전을 옮겼는데 과연 몇 년 사이에 묵은 쌀, 묵은 돈이 줄어들고 햅쌀을 먹게 되었다. 그 대신 절은 피폐해졌으며, 6·25 때 이 절은 소실되어 버렸는데 그 뒤 새로 지을 때는 대웅전을 본래 자리로 옮겨 지었다는 설화이다.
이 밖에 베틀바위 · 산신바위 · 고리봉 등에 얽힌 전설, 대산면의 옥정(玉井)과 관계된 남원진씨(南原晉氏) 시조담, 최영(崔瑩)과 치마대(馳馬臺), 아지발도를 죽인 이성계, 권율(權慄)과 둔남면설화, 사찰 관련설화와 역사적 인물에 관한 설화, 춘향전의 근원설화 등이 전한다.
이 고장에 구전되고 있는 민요는 노동요 · 의식요 · 비기능요 등 다양하고 풍부하다. 노동요로는 농업노동요가 중심이 되는데, 모심기노래로는 판소리 「농부가」조의 「어이여루 상사디여」가 있으며, “얼시구 좋다 지화자 좋다/어서바삐 수그러보세/여 예 여 예로 상사디어”와 같이 선후창으로 부르는 것도 있다.
이 고장의 동부지역 및 이백면 · 산동면 · 덕과면에서는 경상남도지방의 교환창식의 모심기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선율은 특유의 계면조이다.
논매기노래는 초벌 · 두벌 · 세벌 논매기노래가 모두 있으며, 잦은 논매기노래인 “(앞소리) 둘렀다 둘렀다 에엥둘렀다/(뒷소리) 에우이 싸세/서마지기 논배미를/에우이 싸세/칭칭둘러서 쌈을 싸세…….”라는 「에우싸세」와 “에헤야하 에헤냐노 헤헤헤히에노 아헤이 홍게 노오호”와 같이 풍부한 여음을 위주로 부르는 「방게소리」 · 「만두리」가 대표적인 것이다.
이 밖에 「어리시구나」 · 「어리사호」 · 「에이여루 사월」 · 「양산도」 · 「육자배기」조 등 대부분 선후창으로 부르는 논매기노래와, 교환창으로 부르는 것도 있어 매우 다양하다.
여성노동요로는 삼 삶는 과정이나 보람을 노래하는 「삼삼기노래」와 같이 모여서 부르는 것도 있지만, 밭매기나 베짜기 · 바느질 등 혼자 일하면서 부르는 「진주낭군」 · 「사위삼소」 · 「사촌형님」 · 「중노래」 등 시집살이를 노래한 것이 많으며, 「첩노래」 · 「상추씻는 처녀」 · 「수건노래」 · 「댕기노래」 등 연정 · 상사를 노래한 것도 있다.
기타 노동요로는 가래질노래 · 지경노래 · 상량노래 등이 있으나 뒷소리가 대부분 농업노동요의 여음인 ‘얼럴럴’이나 ‘상사디어’를 포함하고 있으며 농업노동요의 사설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많다.
나무꾼노래는 「육자배기」조의 「산타령」을 주로 부른다. 의식요로 「상여노래」는 “(앞소리) 북망이 어디라고/그리쉽게 가시는고/(뒷소리) 어농 어허농 어나리농차 어허농…….”과 같이 선후창으로 부르며, 뒷소리는 ‘어하 어하 어이가리’ 등이 사용되기도 한다.
세시의식요로는 정월대보름경에 지신밟기를 하면서 부르는 「성주풀이」 · 「선산풀이」 · 「액막이노래」가 있다. 「액막이노래」는 앞소리를 “정칠월 이팔월 삼구월 사시월 오동지 육섣달/우환근심 걱정없이 액을액을 다 막아낸다.”라고 시작해 각 달에 드는 액을 막는다고 하는 월령체이며, 뒷소리를 “에루야기야 에루야기야/어기어차 어기로구나”라고 받아 선후창으로 부른다.
보절면에서는 백중날 삼동굿을 하면서 “(앞소리) 삼강오륜 예의촌은 · 삼교정이 이 아닌가/(뒷소리) 어럴럴럴 지네밟세/일심으로 지네밟세.”라는 「지네밟기노래」를 부른다. 이밖에 “신작로 가상에 솥때우는 쟁이야.”라고 임과 떨어진 정을 때워달라는 「땜장이타령」과 「한문서당패노래」 · 「남원아리랑」 · 「노랫가락」 · 「청춘가」등이 불리며, 「쑥대머리」 · 「사랑가」 등 판소리 한 대목이나 삽입가요가 많이 불린다.
소백산맥이 통과하는 남부 내륙지방에 속해 지형이 험준하고 산지가 많으나, 오수 · 남원 분지와 운봉분지 등 산간분지가 발달해 비교적 경지면적이 넓은 편이다. 2008년 현재 농가인구는 시 전체인구의 38.7%, 경지율은 22.2%이다. 경지면적은 15,903㏊로 그 중에 논이 78.9%로 논농사 중심의 주곡농업이 이루어진다.
주곡작물 외에 딸기 · 고랭지채소 · 과수재배 등이 활발하다. 고원지대인 운봉분지에서는 조생종벼가 재배되고, 무 · 배추 등의 고랭지농업이 활발하다. 사매면 · 덕과면 · 주생면 등지에서는 인삼재배도 이루어진다.
산지가 많아 축산업이 발달해 한우 · 젖소 · 면양 · 돼지 등이 많이 사육된다. 1971년에 국립종축장이 설치된 운봉읍에서는 일찍부터 면양 · 육우가 대규모로 사육되었으며, 아영면 · 인월면 등의 운봉분지에서는 한우 · 젖소 · 돼지 등의 사육이 활발하다.
산지가 전체 면적의 63.4%를 차지해 밤 · 호두 · 잣 · 대추 · 은행 · 송이버섯 · 약초 · 산수유 · 산나물 등의 임산물 생산이 활발하다. 이 중 잣 · 송이버섯 · 산나물 · 토종꿀 등은 도내 주산지이다. 산동면 · 이백면 · 대강면 등에서는 자연산 송이버섯, 산내면에서는 토종꿀 · 약초가 많이 생산된다.
공업의 발달은 미약하였으나 광치1· 광치2· 노암 · 어현 · 인월 등 5개소의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있어 지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주로 목재 및 나무제품, 음식료품, 펄프 · 종이 및 종이제품, 화학제품, 고무플라스틱제품, 의복 · 섬유 및 모피제품, 담배 등의 생산이 중심을 이룬다.
예로부터 지리산의 목재를 원료로 한 목기의 주산지로 조선 초기부터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운봉읍과 산내면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목기는 대부분이 제기(祭器)이지만 꽃병 · 항아리 등의 장식용 목제품도 생산되고 있다.
목기 외에 질이 좋기로 유명한 운봉읍의 꽹가리와 금동 조산마을의 방구부채는 특산품으로 유명하다.
남원시는 남부내륙지방의 상업 · 서비스업의 중심지로 순창군 · 임실군과 전라남도 곡성군 · 구례군도 세력권에 포함하고 있다.
시장으로는 상설시장 1개소, 정기시장 3개소, 가축시장 1개소가 있다. 하정동에 있는 상설 용남시장(龍南市場)은 1970년에 개장되었다. 섬유제품 · 청과물 · 어물 · 잡화 등이 거래되며, 인근의 임실군 · 순창군 · 장수군과 전라남도 곡성군 등을 상권으로 하고 있다. 정기시장으로는 금동의 남원장이 4·9일, 운봉읍 서천리의 운봉장이 1·6일, 인월면 인월리 인월장이 3·8일에 각각 개설된다.
남원장은 상권과 거래품목이 용남시장과 비슷하나 규모가 제일 크며, 면단위에서 집산되는 약재와 산채로 성시를 이룬다. 운봉장은 농산물 · 생활필수품 · 산채 · 약초 등을 거래하며 가을철에는 감과 곶감 거래가 활발하다. 인월장은 농산물과 생활필수품이 주로 거래되며, 특히 산채류의 집산이 유명하다.
이 밖에 역전의 북부시장, 동문 밖의 동문시장은 보조구실을 하는 시장으로 농수산물 · 공산물 · 농기구 · 의류 등이 많이 거래된다. 조산동에 개설되는 우시장은 성수기에는 2천여 마리가 거래되어 수원우시장 다음으로 큰 규모이다. 그 외에 할인점 1개소와 쇼핑센터 5개소가 있다.
교통은 시가 3개 도를 접하고 있으며, 섬진강을 통해 전라남도와 이어지고 팔랑치(513m)를 통해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남도와 연결되어 예로부터 남부내륙지방의 교통중심지였다. 1936년에 개통된 전라선 철도와 1988년에 개통된 광주대구고속도로(88올림픽고속도로)가 통과하며, 2011년 개통한 순천완주고속도로가 남원시를 통과하여 외부 지역과의 교통이 편리하다.
또한 전주∼여수간의 국도, 광주∼대구간의 국도, 무주∼남해간의 국도가 시 중심부에서 교차한다. 전주∼남원간의 도로는 왕복 4차선 고속화도로로 전라남도 여수 · 순천 등지와 직선으로 연결되어 화물차를 중심으로 한 교통량이 많다. 지리산국립공원과 광한루 등의 관광지가 많아 관광객도 많다. 지리산국립공원을 가로질러 주천면에서 산내면∼구례군간의 지방도로에 연결되는 관광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지리산국립공원의 수려한 산세를 중심으로 한 자연관광지와 많은 국가유산을 중심으로 한 역사관광지, 춘향의 설화를 중심으로 한 관광지를 형성하고 있어 매우 다양하고 풍부한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국립공원 1호인 지리산은 민족의 명산으로 백두산, 금강산, 한라산을 비롯해 해동 삼신산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지리산의 사계(四季)는 어느 계절 할 것 없이 경승이 빼어나다. 원시림을 비롯하여 맑은 물, 깊은 계곡, 높은 산, 희귀동식물 등 무한한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어 중요한 관광자원이 된다.
육모정에서 구룡폭포에 이르는 구룡계곡, 정령치에서의 조망, 반선 · 뱀사골 · 달궁에 이르는 반선계곡 · 노고단 등정 등은 남원시가 보유한 천연관광자원이다. 정령치에서 행글라이딩을 하는 것을 보는 것 또한 일품이다. 이들 지리산 관광지를 연결하는 관광도로의 개설로 많은 관광객이 이들 경승지를 등산장비 없이 관광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졌다.
여러 개의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는 등산로는 국내 제일이다.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과 편의시설은 산내면의 반선과 달궁계곡에 집중해 있고, 시에는 숙박시설이 많다. 요천변에는 국민관광단지의 개발이 진행중에 있다.
춘향이의 설화와 관련된 춘향이고개, 광한루 일대에 유적유물이 있고 해마다 춘향제를 열어 경향 각지의 미인미녀 중에서 춘향이를 선발하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광주대구고속도로와 전주∼남원간 6차선도로가 개설되었고, 호남선의 교통이 발달해 많은 사람이 찾는다.
아영면은 한국의 대중적 고전인 「흥부전」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밤재터널을 넘어가면 전라남도 구례군의 산동온천지구가 있고 인근에는 한증막들이 많아 여성 관광객이 많이 모인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오는 군사요충지에 위치해 남원 인근에는 역사적 유물유적이 많아 역사관광지로서도 손색이 없다.
지방기념물인 교룡산성과 교룡산국민관광단지, 만인의총, 여원치를 넘어 운봉분지에는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비, 남원종축장, 운봉분지 주변의 오랜 취락들, 만수천변 하안단구에 위치한 실상사와 그 주변 산내면 · 인월면 등지의 목기제조와 특산품 생산은 유명하다.
시에서는 현재 춘향관광, 흥부관광, 변강쇠옹녀관광, 동편제판소리관광, 남원예술관광, 지리산관광 등 다양한 테마관광을 개발하여 안내하고 있다.
시의 동부에 위치한 읍. 면적 69.50㎢, 인구 4,015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서천리이다. 본래 운봉군 지역으로 운봉읍내가 되므로 군내면이라 해 용산(龍山) · 당월(堂月) · 북천(北川) · 동천(東川) 등 6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면의 원평 · 주촌 · 봉곡 · 신촌 등 16개 리, 서면의 여원 · 장치 · 장교 등 14개 리, 남원군 상원천면 노치리의 일부, 그리고 장수군 하반암면의 와룡리 일부를 병합해 운봉면으로 남원군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높이 450∼650m의 고원상분지를 형성해 주변이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동쪽의 산지에서 용산천과 동천이 분지내를 흘러서 골짜기를 만들고 그 주변에 퇴적물이 엷게 덮여 있다. 관개용수를 주변의 계곡에서 확보하기 쉬워서 분지 가운데의 농경지는 쌀농사 중심의 주곡작물을 재배한다.
기후 때문에 도내에서는 제일 먼저 추수한다. 분지 주변에는 산록완사면이 넓게 발달해 국내 최대의 면양종축장 남원지소가 있고 주변은 넓은 초지가 개발되어 있다. 마늘 · 고추 등의 전작물생산과 고랭지채소와 대규모 화훼단지가 있어서 품질 좋은 꽃을 생산해 도시지역으로 반출하고 있으며, 화훼농업연구소도 있다.
교통은 전주 · 남원 · 대구를 연결하는 국도가 지나며, 지리산관광도로와 연결되어 있다. 광주대구고속도로도 여원치 아래 인근을 지나고 있다. 문화유적은 화수리에 황산대첩비지, 산덕리에 운봉향교 · 용암서원 등이 있고, 장교리와 가산리에 성터가 있다.
서천(西川) · 주촌(舟村) · 덕산(德山) · 공안(孔安) · 행정(杏亭) · 산덕(山德) · 동천(東川) · 용산(龍山) · 북천(北川) · 준향(準香) · 장교(長橋) · 권포(權布) · 임(林) · 신기(新基) · 매요(梅要) · 가산(佳山) · 화수(花水) 등 17개 리가 있다.
시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33.45㎢, 인구 2,60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옹정리이다. 본래 남원군 지역으로 금안부곡(金岸部曲)이 있었으므로 금안면이라 해 창활(昌活) · 내기(內基) · 택촌(宅村) 등 7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기지면의 고룡(古龍) · 호산(狐山) · 입암(立巖) 등 7개 리와 두동면의 상신 · 도촌리의 일부, 그리고 주포면의 제천리 일부를 병합해 금안과 기지의 이름을 따서 금지면이 되었다.
1956년 두동면의 하도 · 상신의 2개 리를 편입하였다. 서부에는 문덕봉 · 고리봉 등 높은 산지가 있으나 동부의 요천변에는 평야가 있다. 이 금지평야는 북쪽의 주생면에서부터 전라남도 곡성까지 요천을 따라 발달해 쌀 · 보리 등 주곡작물의 생산이 이루어지고 근래에는 비닐하우스 재배로 딸기가 생산되고 있다.
교통은 전라선 철도와 남원∼곡성간의 국도가 통과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방촌리에 환봉사가 있다. 옹정(甕井) · 입암(笠巖) · 서매(書梅) · 방촌(芳村) · 택내(宅內) · 창산(昌山) · 상신(上新) · 신월(新月) · 상귀(上貴) · 귀석(貴石) · 하도(下島) 등 11개 리가 있다.
시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43.94㎢, 인구 1,81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사석리이다. 본래 남원군 지역으로 초랑방이라 해 곡촌(谷村) · 도곡(道谷) · 송내(松內) · 강석(江石) 등 11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견소곡면의 옥전 · 택촌 · 평촌 등 13개 리와 생조벌방의 사촌리, 그리고 전라남도 창평군 입면의 하촌리 일부를 병합해 섬진강을 끼고 있다 해 대강면이라 하였다.
1970년 수홍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85년에 폐지되었다. 섬진강변에 입지해 남부에 넓은 평야가 있고 면의 서부는 편마암으로 구성된 350m 정도의 높이를 가진 산지이며, 100m 정도의 분지가 형성되어 있다. 섬진강 유역의 평야에서는 쌀이 생산되고 산간지방에서는 담배와 양잠업이 행해지고 있다. 교통은 남원∼금지간의 도로에만 의존하므로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풍산리에 풍계서원과 심로사가 있다. 사석(沙石) · 송대(松帶) · 강석(江石) · 방동(芳洞) · 월탄(月灘) · 생암(生巖) · 신덕(新德) · 방산(芳山) · 풍산(楓山) · 수홍(水鴻) · 옥택(玉宅) · 평촌(坪村) · 입암(立巖) 등 13개 리가 있다.
시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36.09㎢, 인구 1,74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운교리이다. 본래 남원군 지역으로 시라산이 있으므로 시라산방(時羅山坊) 또는 시산면이라 해 노촌(蘆村) · 신계(新啓) · 옥전(玉田) 등 7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곡면의 하대 · 소대 · 노산 · 월계 등 16개 리와 성내면의 서동 · 감동 일부를 병합해 대곡과 시라산의 이름을 따서 대산면이 되었다.
면의 서부는 편마암으로 된 산지이고 나머지 지역은 화강암지역으로 이들이 심층풍화되어 분지가 발달해 250m 미만의 완사면이 남쪽으로 펼쳐진다. 평야지대에서는 주곡작물 생산 농업과 담배 · 과수재배 · 축산업이 활발하다.
교통은 남원∼광주간의 국도가 면의 남부를 통과한다. 문화유적은 대곡리에 고암사, 신계리에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운교(雲橋) · 금성(金城) · 수덕(水德) · 대곡(大谷) · 풍촌(楓村) · 신계(新溪) · 옥률(玉栗) · 길곡(吉谷) 등 8개 리가 있다.
시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23.73㎢, 인구 1,03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고정리이다. 본래 남원군 지역으로 덕고방이라 해 신정(新亭) · 월평(月坪) 등 10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적과면의 만적 · 도촌 · 작소 등 9개 리와 고절면의 다산리 일부와 임실군 둔덕면의 용정 · 대촌의 일부, 그리고 장수군 외진전면의 시목리 일부를 병합해 덕고와 적과의 이름을 따서 적과면이 되었다.
1983년 금암리가 임실군으로 편입되었다. 면의 동부에는 천황산 등의 산지가 있으나 대부분 높이 150m 미만의 구릉지대이다. 주곡농업 이외에 축산업 · 양잠업 · 담배재배가 활발하고 생강과 담뱃대가 특산물이다.
교통은 전라선 철도와 전주∼남원간의 국도가 통과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만도리에 호암서원이 있다. 고정(高亭) · 만도(晩島) · 신양(新陽) · 사율(沙栗) · 덕촌(德村) · 용산(龍山) 등 6개 리가 있다.
시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41.93㎢, 인구 1,678명(2015년 현재). 면소재지는 신파리이다. 본래 남원군 지역으로 보현방이라 해 중현(中峴) · 파동(波洞) · 신동(薪洞) · 신흥(新興) 등 13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절면의 갈치 · 서당 · 신촌 · 개양 등 13개 리와 적과면의 도촌 · 은천리의 각 일부를 병합해 보현과 고절의 이름을 따서 보절면이 되었다.
면의 동부는 천황봉 등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서부는 높이 100∼200m의 분지가 넓게 발달하고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쌀 · 보리가 많이 생산되고 담배재배와 축산업도 활발하다. 교통은 남원∼산서간의 지방도가 면의 중앙을 지나나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도룡리에 보현사가 있다.
신파(新波) · 서치(書峙) · 괴양(槐陽) · 진기(眞基) · 금다(錦茶) · 황벌(黃筏) · 도룡(道龍) · 사촌(沙村) · 성시(城侍) 등 9개 리가 있다.
시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32.25㎢, 인구 1,67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오신리이다. 본래 남원군 지역으로 매안방 또는 매내면이라 해 상신(上新) · 중신(中新) · 신촌(新村) 등 8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사동면의 서원 · 도촌 · 수동의 7개 리와 적과면의 오현리 일부를 병합, 사동과 매안의 이름을 따서 사매면이 되었다.
지형은 화강암이 심층풍화되어 북쪽으로 열려 있는 분지상이며, 동 · 서 · 남쪽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쌀 · 보리가 많이 생산되고, 산록에서 축산업과 양잠업을 하고 있다. 교통은 전라선 철도와 전주∼남원간의 국도가 발달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서도리에 노봉서원과 오리정(五里亭)이 있다. 오신(梧新) · 서도(書道) · 계수(桂壽) · 인화(仁化) · 화정(花亭) · 대율(大栗) · 월평(月坪) · 관풍(官豊) · 대신(大新) 등 9개 리가 있다.
시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103.50㎢, 인구 2,21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정리이다. 본래 운봉군 지역으로 지리산의 안쪽이 되므로 산내면이라 해 덕동(德洞) · 반산(伴山) · 미동(米洞) · 와운(臥雲) 등 28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원군 상원천면의 달궁리를 병합해 덕동 · 부운 · 입석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다.
면의 대부분이 심산유곡으로 되어 노고단 · 만복대 등지에서 발원한 심원계곡이 반야봉에서 흘러드는 뱀사골계곡과 반선에서 합류해 동면의 인월에서 흐르는 광천과 입석리에서 합류되어 남동쪽으로 흐르는 남강의 상류지역이 된다. 만수천(萬壽川)에 높이 300∼500m의 하안단구가 발달해 완사면을 이룬다.
좁은 곡저평야를 중심으로 주요 농산물인 쌀 · 보리와 콩 · 감자 등이 생산되며, 하안단구와 산록에서는 버섯재배와 함께 토종꿀 · 송이버섯 · 오미자 등의 한약재가 생산되나 영세하여 소득이 적다. 지리산국립공원의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목기제조 · 기념품상점 · 편의시설 들이 도로변에 발달하고 있다.
산채나물 · 잦 · 호도 등 산지산품이 생산되고 있다. 반선계곡 · 달궁계곡 · 심원계곡 · 뱀사골계곡의 심산유곡을 오르는 등산객과 관광객이 많아 여름철에는 성시를 이룬다. 교통은 남원 · 운봉 · 인월 · 함양으로 통하는 국도와 대정 · 반선 · 달궁 · 심원 · 노고단 · 정령치로 통하는 관광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입석리에 실상사를 비롯해 백장암삼층석탑 · 수철화상능가보월탑 · 석등 · 부도 · 삼층석탑 등의 유적이 있다. 대정(大井) · 백일(白日) · 중황(中黃) · 장황(獐項) · 입석(立石) · 내령(內靈) · 부운(浮雲) · 덕동(德洞) 등 8개 리가 있다.
시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53.83㎢, 인구 2,02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태평리이다. 본래 남원군 지역으로 천황산 동쪽이 되므로 산동면이라 해 목동(木洞) · 이곡(梨谷) · 태평(太平) · 신풍(新豊) 등 15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목동 · 식련 등 7개 리를 관할하였다.
요천 주변을 따라 높이 150∼250m의 산록완사면과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평야지대에서의 주곡생산 농업과 송버섯의 산지로 유명하다. 도로는 남원∼무주간의 도로가 통과한다. 근년에는 지리산온천지구가 개발되어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이 모여든다
문화유적은 태평리에 할미성이 있다. 태평(太平) · 목동(木洞) · 식련(植蓮) · 부절(釜節) · 대기(大基) · 월석(月席) · 대상(大上) 등 7개 리가 있다.
시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33.19㎢, 인구 2,27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송기리이다. 본래 남원군 지역으로 두동방이라 해 구기(舊基) · 도촌(島村) · 세전(細田) 등 15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금안면의 석전 · 신기의 일부와 수지면의 남창리 일부를 병합해 하도 · 세신 · 양평 등 9개 리로 개편하였다. 1956년 하도 · 상신의 2개 이를 금지면에 이관하고 후송면을 병합해 흑송과 두동의 이름을 따서 송동면이 되었다.
오수 · 남원 · 운봉으로 연결되는 중생대 대보화강암지역의 남쪽에서 섬진강과 요천이 합류해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해 곡성평야의 북동부를 차지해 경지면적이 넓다.
쌀 · 보리 등 주곡작물 생산이 위주이며, 복숭아 · 포도재배 등 과수농업이 활발하고 비닐하우스 재배에 의한 채소와 화훼생산이 증가하고 있다. 교통은 남원시와는 지방도로 연결된다. 국가유산으로는 흑송리에 고분군과 용투산성지, 송내리에 박계성사우, 두신리에 두곡서원이 있다.
송기(松基) · 신평(新坪) · 송내(松內) · 송상(松上) · 사촌(沙村) · 장국(奬國) · 흑송(黑松) · 장포(長浦) · 영동(嶺東) · 연산(蓮山) · 양평(陽坪) · 두신(杜新) · 세전(細田) 등 13개 리가 있다.
시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31.55㎢, 인구 1,25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호곡리이다. 본래 남원군 지역으로 물머리방 또는 수지방이라 해 남창(南倉) · 초리(草里) · 마연(馬淵) · 산촌(山村) 등 15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두동면의 세곡리 일부와 송내면의 생촌리 일부를 병합해 남창 · 초리 · 산정 등 6개 리를 개편, 관할하였다.
면내에는 경두산(775m) 등의 산지와 100∼150m의 분지가 발달되어 있다. 산지와 연속해서 섬진강 지류인 수지천 주변에 평야가 발달했으며, 주요 농산물로 쌀 · 보리 등의 주곡작물을 생산하고 있다. 산간지역에서는 담배재배와 축산업이 발달되어 있다.
교통은 주천∼금지를 통해 남원과 곡성에 연결되지만 면을 통과하는 도로는 없다. 국가유산으로는 산정리에 석봉서원이 있다. 호곡(好谷) · 남창(南倉) · 초(草) · 산정(山亭) · 유암(柳巖) · 효평(孝坪) 등 6개 리가 있다.
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35.43㎢, 인구 2,02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청계리이다. 본래 운봉군 지역으로 운봉읍내 북쪽이 되므로 북상면이라 해 아곡(阿谷) · 점촌(店村) · 당동(唐洞) · 봉대(奉大) 등 13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북하면의 구상 · 두락 · 성리 등 9개 리를 병합해 운봉현의 옛 이름인 아영을 따서 아영면이 되었다.
풍천(楓川) 주변을 따라 400∼500m의 산록완사면이 발달하였다. 주요 산업은 쌀 · 보리 등의 주곡농업 이외에 산록을 이용한 축산업 · 양잠업 · 과수재배와 고랭지채소 재배가 이루어진다. 교통은 동면의 인월리에서 일대리까지 지방도로 연결되나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구상리에 봉화산봉수대, 두락리에 고분 등이 있다. 갈계(葛溪) · 아곡(阿谷) · 청계(淸溪) · 봉대(奉大) · 인풍(引風) · 월산(月山) · 성(城) · 구상(九相) · 일대(日臺) · 의지(蟻池) · 두락(斗洛) 등 11개 리가 있다.
시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43.38㎢, 인구 2,40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과립리이다. 본래 남원군 지역으로 백암면이라 해 초동(草洞) · 폐문(閉門) · 척동(尺洞) 등 9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백파면의내동 · 계산 · 남평 · 수가 등 11개 리를 병합해 백암과 백파의 이름을 따서 이백면이 되었다.
면의 동부는 화강암지대의 산지이며 요천 주변에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효기리 주변에 좁은 분지가 있다. 그러나 화강암이 심층풍화되어 풍화대가 매우 두껍다. 주요 농산물인 쌀 이외에 송이버섯 채취가 활발하다.
교통은 광주 · 남원 · 대구로 통하는 국도와 고속도로가 통과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초촌리에 백제고분군, 과립리에 석불, 척문리에 오층석탑, 양가리에 주지암과 절터, 효기리에 미륵암석불 및 요계서원이 있다. 과립(科笠) · 초촌(草村) · 척문(尺門) · 서곡(書谷) · 내동(內洞) · 남계(藍鷄) · 강기(康基) · 양가(陽街) · 평촌(平村) · 효기(孝基) 등 10개 리가 있다.
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37.46㎢, 인구 2,94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서무리이다. 본래 운봉군 지역으로 운봉읍내 동쪽이 되므로 동면이라 해 장재(長材) · 석치(石峙) · 중군(中軍) · 신우(新牛) 등 23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지하면의 이동 일부를 병합해 남원군 동면에 편입되어 중군 · 인월 · 서무 · 취암 등 9개 리를 관할했고, 1998년에 명칭이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면의 동남부는 높이 1,000m 이상의 고산지대로 지리산국립공원의 일부에 속하며, 면의 중심지인 인월 주변은 높이 450m 내외의 고원상분지가 발달해 운봉고원의 일부에 속한다. 운봉 쪽에서 광천(廣川)이 흘러 남강의 상류가 된다.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서리가 빨리 내리고 겨울이 길어 전라북도에서 운봉과 함께 추수가 가장 빠르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쌀 · 보리가 주이고, 잣 · 산나물 · 더덕 등이 많이 생산되며, 고랭지채소농업도 행해지고 있다. 산간지역을 중심으로 축산업도 활발하다.
교통은 남원∼대구, 산청∼아영, 인월∼산내간의 도로와 광주대구고속도로가 통과해 교통이 편리하다. 인월리의 팔량치는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교통로로 예로부터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해 남원성에서 진주성으로 연결되는 직선거리이다.
문화유적은 유곡리에 삼국시대의 고분군, 할미성(合民城, 合未城) 등이 있다. 인월(引月) · 중군(中軍) · 서무(西茂) · 취암(就巖) · 건지(乾芝) · 유곡(酉谷) · 상우(上牛) · 성산(城山) · 자래(自來) 등 9개 리가 있다.
시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26.28㎢, 인구 1,99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제천리이다. 본래 남원군 지역으로 요천((蓼川) 또는 산천) 가가 되므로 주포면이라 해 지당(池塘) · 유천(楡川) · 충촌(忠村) 등 8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이언면의 부동 · 상동 · 중동 · 하동의 4개 리, 남생면의 낙동 · 광촌 등 5개 리, 흑성면의 내동 · 백송평 · 척동의 각 일부와 성내면의 감동리 일부, 견소곡면의 수촌리 일부, 대곡면의 노산리 일부, 기지면의 고룡리 일부를 병합해 주포와 남생의 이름을 따서 주생면이 되었다.
오수 · 남원 · 운봉으로 연결되는 대보화강암지대의 남서부에 해당해 서쪽 대강면의 경계지대에 400∼600m의 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산지에서 요천 쪽으로 100∼200m의 산록완사면이 발달했고 금풍제의 용업용수를 이 지역에 공급해 주요 농산물은 벼농사 이외에 마늘 · 참깨 · 약초재배 · 온실재배 · 관상수재배 등이 활발하다.
교통은 전라선 철도와 전주 · 남원 · 순천을 연결하는 국도가 통과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제천리에 유천서원, 상동리에 용장서원, 내동리에 할미성, 지당리에 석조여래입상, 정송리에 정충사, 낙동리에 석조여래입상 등이 있다. 지당(池塘) · 상동(上洞) · 중동(中洞) · 정송(貞松) · 영천(嶺川) · 제천(諸川) · 낙동(樂洞) · 내동(內洞) · 도산(道山) 등 9개 리가 있다.
시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54.64㎢, 인구 2,64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장안리이다. 본래 남원군 지역으로 원천의 아래쪽이 되므로 하원천면이라 해 신촌(新村) · 용담(龍潭) · 호곡(虎谷) · 안곡(安谷) 등 11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원 · 천면의 내기 · 고촌 · 회덕 · 노치의 4개 리와 주촌면의 비안 · 양팔 · 술산 · 어은 · 세현 등 17개 리, 그리고 장흥면의 천거 · 상삽 · 애현 등의 일부와 만덕면의 죽우리 일부를 병합해 주촌과 원천의 이름을 따서 주천면이 되었다.
1935년 노암리가 남원읍에 편입되고, 1983년 주천면의 어현리 · 신촌리가 다시 남원시에 편입되었다. 면의 대부분이 지리산 주 능선의 북사면에 위치해 고리봉 · 다름재 · 뱀재 등 고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동남부는 500∼1300m의 높은 산지로 되어 있으며, 덕치리 · 고기리 등에 500∼600m의 고원과 용궁리에 150∼300m의 분지가 형성되어 있다.
좁은 산간계곡에서 주곡작물을 약간 생산하고, 산지산록을 이용한 젖소 · 비육우 등의 축산업, 약초 · 토종꿀 · 고추재배 등 산간의 산업이 이루어진다. 덕치리와 고기리는 고랭지채소 재배와 목축의 최적지이다.
지리산관광도로의 개설로 도로를 따라서 각종 서비스업이 유도되어 있다. 교통은 남원 · 뱀재 · 구례로 통하는 도로가 개설되어 산동온천단지와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용담리에 용담사지칠층석탑과 석불입상 · 석등, 호경리에 경양사 · 육모정, 송치리에 용양사 등이 있다.
장안(長安) · 주천(朱川) · 배덕(盃德) · 송치(松峙) · 용담(龍潭) · 호기(虎基) · 은송(銀松) · 호경(湖景) · 용궁(龍宮) · 고기(高基) · 덕치(德峙) 등 11개 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