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중유(仲柔), 호는 지소재(志素齋). 할아버지는 남준(南俊)이고, 아버지는 남회(南恢)이며, 어머니는 박소(朴蘇)의 딸이다. 남효온(南孝溫)의 사촌동생이다.
1511년(중종 6)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생육신인 남효온의 족친이라 하여 오래도록 현달한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1517년 함경도경차관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다. 1521년 지평·장령을 거쳐, 1523년에 함경도군적경차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사무처리를 잘못하였다고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그 뒤 곧 정언이 되고 1525년 사섬시첨정·보덕·사간을 거쳐, 1527년 동부승지에 올랐다. 이듬해 참의·우부승지를 거쳐 1530년 대사간·전주부윤이 되었다. 1533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함경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형조판서가 되었다.
1536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진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공조참판이 되었다. 1540년 대사헌이 되어 중종이 재야에 있는 선비를 천거하라고 하자 정홍익(鄭弘翼)을 천거하였다. 이듬해 한성부판윤에 임명되고 1544년 형조판서를 거쳐, 뒤에 찬성(贊成)인 오겸(吳謙) 등과 같이 기영사(耆英社)에 들어갔다.
일찍이 대사헌이 되어 김안국(金安國)과 함께 남곤(南袞)의 잘못을 상소하여 논하자 사론(士論)이 이를 통쾌하게 여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