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성오(聖五, 뒤에 景五로 고침), 호는 신암(愼菴). 경상남도 함양 출신. 노이선(盧以善)의 아들이며, 허전(許傳)의 문인이다. 30세를 전후하여 최익현(崔益鉉)·송병선(宋秉璿)·송근수(宋近洙) 등을 사사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1896년 1월안의(安義)에서 의거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승려 서재기(徐再起)를 선봉장으로 하여 정도현(鄭道玄)·박준필(朴準弼) 등과 진주성을 공격하여 이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때 진주의 정한용(鄭漢鎔) 의진이 노응규 의진에 합세하고, 같은 해 3월 28일 부산을 공격하고자 김해 일대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4월 11일 일본군에게 선제 공격을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한용이 관군과 결탁하여 노응규를 배반함으로써 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또한 아버지와 형 노응교(盧應交)가 살해되고, 가산을 몰수당하였다.
1897년 10월 상경하여 「지부자현소(持斧自見疏)」를 올리고, 1902년 동궁시종(東宮侍從)의 직책을 맡았으나,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렸다. 그리고 1906년 6월최익현 부하로 들어가 활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순창 일대에서 거의 수일만에 최익현 등 12인이 자진 체포되어, 의진이 해산되는 바람에 실현하지 못하였다.
이에 충청북도 황간(黃澗)으로 들어가 서은구(徐殷九)·엄해윤(嚴海潤)·노공일(盧公一) 등을 주력 부대로 재편, 무장하였다. 그리고 1906년 가을 매곡면 일대를 사병 훈련소로 삼아 인근의 이장춘(李長春)·문태수(文泰守) 의진의 의병들과 함께 합동 훈련도 실시하였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8㎞ 지점의 일본군 및 척후대를 여러 차례 공격하여 괴멸시켰다. 그 뒤 경부철도 파괴, 열차 전복 등의 활동을 하였으나, 한성 진군 계획의 누설로 체포되어 한성경무서 감옥에서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가 옥사하였다.
1977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