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3세기 중국 금나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1972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직경 16.7cm, 높이 4.7cm, 두께 0.1cm의 원형인 그릇으로 가볍고 굽이 없다.
고려 때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국 금나라에 들어가 병든 황제의 쾌유를 빌기 위하여 기도할 때 쓰던 청동제의 바루[鉢盂]로 원래는 500점이었다고 한다.
홍석주(洪奭周)의 《연천옹유산록 淵泉翁遊山錄》에 의하면 1828년에 와서는 50점으로 줄어 들었다가, 오늘날에는 30점만이 모두 녹이 슬고 금이 간 채로 남아 있다. 이 그릇들은 보조국사가 황제에게서 직접 하사받은 물건들 가운데 일부로서 부처님께 공양할 때 쓰던 것이라고 한다.
금명(錦溟)보정선사(寶鼎禪師)가 편찬한 《백열록 栢悅錄》에 의하면, 이 500개가 한꺼번에 포개지는데, 이 때 겉 그릇은 안 그릇을 속으로 겹쳐 들이지만 그보다 크지 않고, 안 그릇은 속으로 들어가 밖의 것과 합해지지만 그보다 작지 않을 정도로 그 크기가 서로 차이나지 않으며 안팎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으니 형제 관계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대소 관계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어서 매우 찾아보기 어려운 물건이라 하였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것들을 볼 수는 있지만 헤아리기는 어렵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작은 유기 소반일 뿐이라고 적고 있다.
송광사 사적에는 조선 숙종이 이들 그릇을 감상한 뒤에 그 가공 기교의 뛰어남에 감탄하여 이름을 ‘능견난사’라 붙였다는 기록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