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앙은 환인·환웅·단군 등 삼신을 숭배하는 민간신앙이다. 불교·유교·도교 같은 종교를 수용하기 전부터 고유의 민간신앙으로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전으로는 『천부경』·『삼일신고』·『참전경』 등이 있다. 옛사람들은 환웅의 도읍지인 백두산을 삼신산이라 했고, 삼신신앙의 제천단인 신단수를 중시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삼국과 고려에 이어 마리산 제천단을 수축, 제사지낸 기록들이 나오고 있다. 단군신앙의 유습과 유적들은 오늘날 한국의 민간신앙과 생활문화 속에 남아 있으며, 또 불교나 유교의 여러 제의(祭儀)에도 남아 있다.
불교·유교·도교 등 원래 종교를 수용하기 이전부터의 고유 신앙이요, 수용 이후에도 오래도록 민간신앙으로 전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전으로는 ≪천부경 天符經≫·≪삼일신고 三一神誥≫·≪참전경 參佺經≫ 등 3대 경전이 있으며, 이를 삼화개천경(三化開天經)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천부경≫은 환인시대의 구전이요, ≪삼일신고≫는 환웅천황이 조술(祖述:先人의 설을 본받아 그 뜻을 펴서 서술함)한 것이요, ≪참전경≫은 환인이 직접 366사(事)를 다스린 기록으로 믿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단군신앙의 유습과 유적들은 오늘날 한국의 민간신앙과 생활문화 속에 남아 있으며, 또 불교나 유교의 여러 제의(祭儀) 속에도 남아 있다.
≪조대기 朝代記≫에서 “옛 한국[桓國]나라에 한임(桓因:이하 옛 음을 따라 환인을 한임, 환웅을 한웅으로 표기함)이 있어 천산(天山)에 살면서 득도장생(得道長生)하며 몸을 잘 다스려 무병하였다.”, “천신을 대신하여 교화를 일으켰다.”, “한임천제의 나라 한국에는 ≪천부경≫이 구전되고 있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이미 한임이 다스리던 한국에 신앙형태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한임을 천제의 화신이라 하여 ‘한임천제[桓因天帝]’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사기 神事記≫에는 이보다 먼저 “땅 위에서의 인류의 처음인 태초에, 아반이(男子)와 아만이(女子)가 천신(天神)의 몽교(夢敎)를 받고 칠월칠석날 천하(天河:송화강 또는 바이칼호)를 건너 서로 만나서 세계의 5색 인종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약 1만 년 전에 이미 한얼님인 우주의 유일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또, ≪수두경전≫ 본훈의 “한웅천황이 천신에 제사하고 ≪삼일신고≫를 조술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삼일신고≫ 역시 한임시대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대기≫에 “일찍이 한임은 세상만물을 잘되게 기르고 신고(神誥)를 펴고 치화원리(366事)인 ≪참전계경≫으로 세상을 다스렸다.”고 한 기록은, 또한 한임시대에 치화경(治化經)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렇게 한임시대의 삼화개천경이 한웅시대에도 전수, 계승되었음을 여러 문헌들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한웅천왕이 360여 사로써 인간세상을 다스렸다.”는 기록에서 360여 사는 곧 치화경을 뜻하는 것이다.
≪한국본기≫에 의하면, 한임시대에 벌써 “아침에는 동산(東山)에 올라 해에게 절하고 저녁이면 서천(西川)에 나가 달에게 절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지구 밖의 자연신에 대한 신앙을 말함이다. 한웅 신시 때 칠회제신지력(七回祭神之曆)이 처음 생겼으니 이것이 “역법을 만든 시초이다(造曆始於此).”라고 하였다.
중국학자 서양지(徐亮之)도 중국 역법은 동이에서 창시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칠회력은 그 첫째 날은 천신, 둘째 날은 월신, 셋째 날은 수신, 넷째 날은 화신, 다섯째 날은 목신, 여섯째 날은 금신, 일곱째 날은 토신에게 제사하였다.
따라서 우주의 절대 유일신인 천신은 물론이고 자연신인 달을 비롯한 모든 지상신을 받들어 일신과 다신의 신앙형태가 어우러져 있었다.
또, 옛사람들은 한웅천황의 도읍지인 백두산을 삼신산이라 하여 삼신신앙의 제천단 신단수를 중시하였다. 10월 3일과 3월 16일은 삼신제천일로 연중행사를 하였는데, 이는 세검맞이굿[三神迎鼓祭]이라 하여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단군조선시대는 삼신과 토속다신신앙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강화 마리산의 삼신제천단 축조(단군 51년), 백두산의 10월 3일 제천, 마리산의 3월 16일 제천, 그리고 국중대회(國中大會)는 오늘의 전국체전(全國體典)과 제천과 개천경(開天經) 강독을 함께 겸한 거국적인 대행사였다고 볼 수 있다. 제정일치시대(祭政一致時代)의 행사는 그대로 신앙이면서 정치였다.
이와 같은 행사는 한웅시대의 옛 제도를 그대로 단군이 전승한 것이다. 제6세 단군 달문(達門) 때의 제천문을 보면 그 말미에 “나라의 흥하고 폐함을 말하지 말라, 오직 천신을 받드는 정성에 있을 뿐이다(興廢莫爲說 誠在事天神).”라고 되어 있다. 이로 보더라도 신앙 밖에 따로 정치란 존재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밖에도 3륜(三倫)·5계(五戒)·8조(八條)·9서(九誓)가 이미 이 때 완비되어 있었다. 제3세 단군가륵(嘉勒) 7년 9월의 조칙에 나타난 것을 보면 순(舜)이 제창한 이른바 오륜의 산출 원전을 제시해 주고 있다.
즉, “부모는 마땅히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마땅히 부모에 효도하라. 임금은 마땅히 정의롭게 하고 신하는 응당 충성하여야 한다. 부부는 마땅히 서로 공경하고 형제는 마땅히 서로 우애 있어야 한다. 노소는 마땅히 차례가 있고, 벗끼리는 응당 신의가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유교윤리의 본산이 여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른바 신라의 화랑오계는 단군시대 수두제단에서의 수두오율[蘇塗五律] 덕목이 그대로 화랑국선의 신라까지 이어진 것임을 살필 수 있다. 제3세 단군 가륵 원년(기원전 2182)에 “수두제단을 설립하고 삼륜구서회(三倫九誓會)를 열었다.”고 하였다.
삼륜구서 중 3륜은 부자관계에서의 사랑윤리[愛倫], 군신관계에서의 예도윤리[禮倫], 사제관계에서의 도리윤리[道倫]이며, 9서는 효(孝)·우(友)·신(信)·충(忠)·손(遜)·지(知)·용(勇)·염(廉)·의(義)이다.
이와 같이 고조선 초기에 이미 모든 윤리강목이 완성되었음을 살필 수가 있다. 3륜·5계·8조·9서의 덕목들은 조화·교화·치화의 삼화개천경에서 산출된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최초의 노래로서 한웅시대로부터 전해 오는 <어아가 於阿歌> 역시 제천의례에서 불렀던 신가(神歌)라고 한다. 이 노래는 지금까지 고어체로 전하고 있다.
북부여시대의 신앙은 물론 단군시대의 신앙형태가 이어졌지만, 북부여인으로서 뒷날 고구려 개국 공신이 된 극재사(克再思)는 ≪삼일신고≫의 독법(讀法)을 썼고, 해모수는 건국 8년 10월 공양태모지법(公養胎母之法)을 선포하여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열녀전 列女傳>을 기술하는 데 영향을 주었음이 나타나고 있다.
해모수는 또 건국 20년에 천제를 올리고 대궐 366칸을 세웠다고 했으니, 땅의 회전 수치와 일치하는 교화경의 글자수와 치화경의 조문 366조수와 일치하는 대궐 칸수이다.
또, 한나라의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왕에게 올린 봉선문(封禪文)에서 ‘삼신의 기쁨[三神之歡]’이라고 했다는 것으로 보아 한대에 삼신신앙에 대한 인식이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주몽(高朱蒙) 동명성왕은 그의 조칙에서, “한얼님은 만인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지었고 삼진(三眞:性·命·精)을 골고루 점지하였다(天神造萬人一像 均賦三眞).”고 하였다.
이것은 동명성왕이 삼진을 설명한 ≪삼일신고≫를 숙지(熟知)하고 있었음은 물론, 천신을 받드는 삼신제천의식이 세습되고 있었음을 잘 말해 준다.
또, 그를 도와 고구려를 창업하게 했던 개국 공신 극재사는 교화경의 독법을 지어낼 정도로 도에 대한 달관자였음을 엿볼 수 있다.
제2세 유리왕 때 제천에 제물로 쓰려던 돼지를 놓쳐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를 시켜 되찾아왔으나 돼지의 다리를 부러뜨려 왔기에 신성한 제천의 희생물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그들을 갱 속에 던져 죽여 버렸다. 유리왕이 과격하리만큼 제천에 대한 정성이 지극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의 명재상(名宰相) 을파소는 백운산에 올라 한얼님에게 기도하여 천서(天書)를 받았는데, 이것이 치화경인 ≪참전경≫ 366조였다고 한다. 그런데 을파소의 서문에 의하면 치화경은 한웅천황시대에 세상 다스리는 원리교본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을파소가 “치화경을 힘써 닦으면 국민총화를 이룩하는 데 아무 어려움도 없다.”라고 말한 것을 보아 그의 정치 솜씨는 치화경에서 터득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제11세 동천왕은 평양 기림굴에서 삼신에게 한맞이굿[大迎祭]을 올렸고 <삼륜구덕가>를 부르면서 조의선인(皁衣仙人)을 선발했다고 하였다. 광개토왕(好太王)은 이른 아침 속리산에 올라 제천하였으며, 병사가 출전할 때나 제천의식에는 반드시 신가(어아가)를 불렀다고 한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천신을 몽득(夢得)한 바 있고, 언제나 3월 16일은 강화 마리산에, 10월 3일은 백두산에 제물을 준비하여 천제를 올렸다고 한다. 휘하에 있던 불과 20만 군졸로써 수양제의 100여 만 대군을 상대하여 쾌승의 전공(戰功)을 세운 그의 초인적인 전술은 평소에 지극했던 천신의 가호에 힘입은 바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을지문덕이 “도(道)는 천신(天神)을 섬김에 있고 덕(德)은 국가를 비호하는 데 있다.”고 한 것을 보아도 그의 천신신앙이 지극하였음을 알 수 있다.
3,000 낭도(郎徒)를 이끌고 대동강변 을밀대(乙密臺)에서 선랑(仙郎)들을 지도하던 을밀선인(乙密仙人)은 <다물흥방가 多勿興邦歌>를 불렀다.
그런데 그 <다물흥방가> 가사 속에 ≪천부경≫의 단편들이 끼어 있는 것을 보아 당시 ≪천부경≫이 널리 애송, 연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다물흥방가>는 최치원(崔致遠)이 말한 <난랑비서문 鸞郞碑序文>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즉, <난랑비서문>에서 “무위지사에 처하고 불언지교를 행하며, 들어오면 효도하고 나가면 충성하며, 갖가지 선을 받들어 행하고 모든 악을 짓지 않는다(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入則孝 出則忠 衆善奉行 諸惡莫作).”고 한 것 등은 최치원보다 약 300년 전 고구려 을밀선인의 문도 3,000인이 부르던 <다물흥방가>의 가사를 근거로 삼았음이 분명하다.
서라벌에서의 선인 왕검의 선통(仙統)은 부여의 왕녀였으며, 선도산(仙桃山) 파소성모(婆蘇聖母)의 아들인 혁거세(赫居世)가 계승하였다. 뒷날 아들인 혁거세는 천선(天仙), 어머니인 파소는 지선(地仙)이라 하였다. 중국의 우신관(佑神館)에서도 여선(女仙)으로 모시는 등 선도성모로서 길이 받들어졌다.
더구나 ≪삼국사기≫에 신라에서는 “천자(天子)는 천지와 천하의 명산대천에 제사지내고 입춘 뒤 축일(丑日)에는 풍백제(風伯祭)를, 입하 뒤 신일(申日)에는 우사제(雨師祭)를, 입하 뒤 진일(辰日)에는 영성제(靈星祭)를 올렸다.”고 한 것을 보아도 단군신앙의 천신과 기타 모든 신에게 지성껏 제사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솔거(率居)는 단군상 1,000여 본을 그려 집집마다 숭봉했다고 하였으며, 김생(金生)은 단군의 묵시를 받아 제석경(帝釋經)을 썼다고 하였다.
백제는 건국 20년 2월 왕이 대단(大壇)을 설하고 천지에 친히 제사지냈는데, 이조(異鳥) 다섯 마리가 날아왔다. 또 38년 10월 왕은 대단을 쌓고 천지에 제사지냈다.
제6대 구수왕 14년 봄 남단(南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으며, 제17대 아신왕 3년 정월 남단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제18대 진지왕 2년 정월에는 남단에서 천지에 제사올리고 죄인을 모두 방면하였으며, 제24대 동성왕 11년 10월 왕은 단을 설하고 천지에 제사지냈다.
이상의 기록들은 단군의 제천제지(祭天祭地)의 전통을 백제에서도 그대로 이어 왔음을 역력히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 땅에서 백제의 왕통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제천제지 유풍은 백제가 이어 준 단군의 신앙 유풍임을 살필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중요한 단군신앙의 계승 국가이다. 가장 중요한 사항은 고왕 대조영(大祚榮)이 ≪삼일신고≫를 어찬한 것이다. 그는 714년에 ≪백리경전≫ 교화경에 찬문(贊文)을 썼고, 715년 왕제(王弟)인 대야발(大野勃)은 ≪삼일신고≫의 서문을 썼다.
그리고 고왕 대조영의 처남이자 문적원감(文籍院監) 임아상(任雅相)은 ≪삼일신고≫를 주해(註解)했으며, 제3대 문왕 대흠무(大欽茂)는 739년 ≪삼일신고≫ 봉장기(奉藏記)를 썼다. 뿐만 아니라 대야발이 편찬한 ≪단기고사 檀奇古史≫와 뒷날 고려 이명(李茗)이 지은 ≪진역유기 震域遺記≫의 저본이 된 ≪조대기≫가 발해시대에 편찬되었다.
또, 조선시대 말에 단군교의 교전을 전수한 백봉(白峯)이 도천(禱天)에서 찾아낸 바 있는 태백산 보본단(報本壇) 석실(石室)은 바로 발해 문왕이 봉장한 수많은 전적이 감추어져 있던 곳이다.
조선시대의 북애(北崖)가 찬술한 ≪규원사화 揆園史話≫ 역시 발해의 ≪조대기≫를 바탕으로 한 고려의 ≪진역유기≫ 3권이 그 저본이 되었던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발해에서 백두산에 보본단을 설치하고 제사지냈으며, 요(遼)나라에서도 사당을 세우고 박달나무를 심었다. 태조는 왕비와 같이 청우백마(靑牛白馬)로 삼신에게 제사지냈으며, 금(金)나라 대정(大定) 12년(1172) 12월 백두산 북쪽에 사당을 세웠다. 그리고 명창 4년(1193) 10월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라고 봉책하였다.
태조가 박술희(朴述熙)에게 건네준 <훈요10조>는 ‘천신과 산천신을 제사’하는 팔관의례를 엄수하라고 대대로 왕손에게 엄명할 정도로 단군 때의 신앙이 전승되었다.
선인 왕검의 도맥이 담긴 ≪단군세기≫·≪북부여기≫·≪진역유기≫·≪삼성기≫ 등이 모두 고려 말기 천보산(天寶山)태소암(太素庵)의 장서를 발굴한 데서 힘입은 것임을 부인할 수 없으며, 단군시대의 도맥은 이암(李嵒)·북애·이명 등 당대의 쟁쟁한 석학의 손에 의해 이어져 왔다.
그야말로 고려는 ‘한단전수지진결(桓檀傳受之眞訣)’의 보고였다고 여겨진다. 특히, 백문보(白文寶)·이암 등은 단기(檀紀) 연호를 썼다. 또 이규보(李奎報)는 “고개 밖의 집집마다 신조상이 있다(嶺外家家神祖像).”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볼 때 집집마다 단군상을 모시고 있었음과 그 때의 단군숭배사상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이성계(李成桂)는 꿈에 단군이 주는 금척(金尺)을 받고 <금척송>을 지었다고 한다. 선조의 꿈에 단군이 와서 인조의 산실인 해주부용당을 보호하는 몽조를 보고 인조가 태어났기 때문에 인조를 종(倧)이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삼국과 고려에 이어 마리산 제천단을 수축, 제사지낸 기록들이 나오고 있다. 1472년(성종 3), 1639년(인조 17), 1700년(숙종 26), 1765년(영조 41), 1777년(정조 1), 1781년 등의 기록을 볼 수 있으며, 1429년(세종 11) 평양에 단군 사당을 세우고 동명왕과 같이 제사지냈으며, 1455년(세조 1) ‘조선시조단군지위(朝鮮始祖檀君之位)’라고 위판을 고쳤고, 1459년 왕세자를 거느리고 친히 제사를 올렸다.
1679년과 1697년에 신하를 보내어 제사지내고, 1729년 ‘숭령전(崇靈殿)’이라는 액판을 하사했으며, 1749년 승지를 보내 제사지냈다.
근세 조선에 들어와서는 무엇보다도 고려 말기 ≪단군세기≫를 지은 이암의 현손(玄孫) 이맥(李陌)의 ≪태백유사 太白遺史≫를 들지 않을 수 없다. 40여 종의 전적을 인용, 고증하여 편찬한 이 책은 고유 신앙의 사료가 지금까지 나온 어느 서적보다도 많이 담겨 있다.
세조·예종·성종 등 3대에 걸쳐 전국에 수서령(收書令)을 내려 거두어들인 희귀 사서를 그가 장서각의 찬수관으로 있으면서 모두 탐독할 수 있었고, 16년 동안의 귀양살이에서 채록한 많은 문헌을 참고하였다.
조선시대의 천부경신앙은 아무래도 강한 유풍(儒風)에 의해 선가류가 잠복, 은둔하는 수 밖에 없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도 남사고(南師古)는 특별히 ≪천부경≫을 ‘진경(眞經)’이라고까지 하고 있는바, “무궁한 조화가 출현하니 ≪천부경≫은 진경이다.”라고 하였다.
해외의 단군신앙으로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던 24성(姓)의 도공들이 구주지방(九州地方)의 가고시마(鹿兒島)에서 세운 옥산신사(玉山神社)가 현존하고 있다.
근래에 와서 교단체제를 갖추고 단군교를 선포한 것은 1904년 백두산 대숭전(大崇殿)에서 백봉을 중심으로 33명이 포명식을 가진 것이다. 백봉은 백두산에서 10년 동안 천신에 기도하여 단군에 관한 사료와 경서들이 감추어져 있는 석실을 발견하였다. 이 석실은 발해 때 문왕이 경사를 봉장한 석실이라고 한다.
그 뒤 5년이 지나서 1909년 정월 보름 나철(羅喆)은 한성 북부 재동 취운정 초가에서 ‘단군교 포명서’를 선포하고 단군교 중광식(重光式)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겨우 1년 반 만에 교명 고수파인 정훈모(鄭薰謨)와 대종교로의 개명을 주장한 나철은 갈라서게 되었다.
지금 국내에는 대종교·단군교·현정회·문경개천궁 등 30여 개의 궁전이 있어 종교적 신앙과 개국조로서의 숭배의 터전이 되고는 있으나, 모이는 사람들의 뜻에 비해 그 규모는 지극히 미약하다. 그러나 옛날에는 제석단이라고 하여 집집마다 모셔 온 전통이 있고 국가적인 사당은 그대로 전승되어 왔다.
미신을 빙자한 외래 종교의 핍박으로 인하여 민족 종교에 심한 타격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근래에 다시 뿌리에 대한 강렬한 의욕이 일어나고 있다. 이는 단군계 신종교단체들이 생겨나는 것과 낭만적 웅비사관을 바탕으로 상고사를 새롭게 서술하려는 재야 사학자들의 활동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해석하는 시각에 따라서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다. 사대주의와 식민사관, 서구 맹종사관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민족주의 열풍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단군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자연히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즉, 보본의식(報本意識)에 의한 국조숭배(國祖崇拜)와 천신숭배에 의한 종교의식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신앙면을 주제로 하는 단군신앙만을 가지고 거론한다면, 신앙 그 자체를 참되게 하기 위해서는 단군에 대한 역사성과 사상성을 병수(並修)해야 하며, 역사와 사상에 대한 학술적 교육이 뒤따라야 한다.
지금 단군신앙인들의 단군에 대한 이해도를 보면 개개인마다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일정한 체계 있는 교육기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군에 관한 한 역사라면 우리 민족의 뿌리역사요, 사상이라면 우리 민족의 뿌리사상인 만큼 민족 차원에서도 중대한 문제이다.
현재 성황당·장승·제석단을 비롯하여 산신·용왕·조왕·칠성 등의 여러 토속신을 둘러싸고 천신인 유일신 한얼님신앙까지 실로 방대한 신앙 범위를 가지고 있으며, 유구한 민족 정통을 가진 정통적 잠재력은 매우 큰 것이다.
뿌리신앙의 생기(生氣)는 민족정기의 사활(死活)과 직결되는 것이다. 표면에 드러나 있는 신앙형태는 비록 영세하고 미미하더라도 수천 년을 지나도록 여러 가지 핍박과 외래 문화의 격랑에 질식하지 않고, 지하에서 끈질기게 생동할 수 있었던 그 생명력은 한민족 모두의 뿌리요 정통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족혼의 참모습이요 겨레의 혈맥(血脈)이기도 하다. 우리의 개천삼화(開天三化)의 진리는 신인합일사상(神人合一思想)이요 심물불이사상(心物不二思想)이다. 이는 기본 경서인 3대 경전이 그렇게 가리키고 있다. 단군은 종교적 차원에서 신앙대상으로 숭배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한민족 공동체의 상징적 구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남북통일을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실질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문화적 원천이 될 수 있고, 또한 남북한 간의 정통성 경쟁에서 핵심적인 가치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1990년대에 들어와서 민족공동체의 단일한 시조로서 단군에 주목하려는 노력들이 남한과 북한에서 동시에 등장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재야 사학과 제도권의 실증사학이 계속 갈등을 보이면서 단군 관련 종교단체와 사회단체에서 주로 단군숭봉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는 단군숭봉사업은 단군에 대한 숭경을 우상숭배로 거부하는 기독교계 인사들의 반대로 지역 갈등과 같은 사회문제로 비화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고구려 중심사관을 견지해 왔던 기존의 태도를 바꾸어 평양 부근에서 단군릉을 발견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중건하는 작업을 벌이는 등 국가적인 차원에서 단군을 민족의 중심 상징으로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