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은 단군조선(檀君朝鮮) · 기자조선(箕子朝鮮) ·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 대별된다. 이 가운데 단군조선은 우리 민족사에서 최초로 역사에 나오는 국가이며, 개국시조는 단군인 것으로 나와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고조선조(古朝鮮條)에 인용된 중국의『위서(魏書)』에 의하면,『위서』가 찬술되던 당시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는 이가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이름하니, 시기는 요(堯)임금 때와 같다고 한다. 또한,『고기(古記)』를 인용하여 환웅(桓雄)과 웅녀(熊女) 사이에 태어난 단군이 요임금 즉위 50년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조선이라 이름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단군에 의한 조선을 전조선(前朝鮮), 기자에 의한 조선을 후조선(後朝鮮)이라 하고 위만조선을 후속시켜 고조선을 삼조선(三朝鮮)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이라는 이름 아래 단군조선 · 기자조선을 포괄하고 있어 앞의 것과 차이를 보인다.
단군조선의 실상에 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검토될 수 있으나, 그 역사적 성격을 고고학적 시기 구분과 연결시키면 우리 나라의 신석기문화 및 일부 청동기문화와 관련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단군조선의 성격은 국가 형성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회이며, 우리 민족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의의가 크다.
고조선을 종래 단군 1,000년, 기자 1,000년의 역사로 언급해 왔듯이, 고조선을 곧 단군조선만으로 보는 견해는 무리이며, 찬성이든 반대이든 간에 기자를 역사의 공백으로 남기는 것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흔히 고조선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단군신화를 고조선의 건국신화로 설명하지만, 단군조선이나 왕검조선의 건국신화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단군조선의 건국 연대는 『동국통감(東國通鑑)』의 무진년(戊辰年)을 따라 서기전 2333년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 연대가 한 치도 틀림없는 연대라고 확신할 수 없으나 그 비슷한 언저리는 항상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삼국유사』의 ‘요임금과 같은 시기’라는 표현도 단군조선의 시작이 오래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나라를 열고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였다(開國號朝鮮)”는 것은 새로운 지도자 단군이 한 집단, 한 사회를 열었다는 의미이고 규모를 더 확대해서 나라를 열었다고 해도 인구수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인식되어온 이른바 기자조선의 출현(서기전 12세기)은 우리 역사에서 청동기문화의 시작과 거의 일치하며, 이는 단군조선에서 기자조선으로의 변화가 단순한 정치적 변화가 아닌 대규모의 문화 · 종족적 변화를 반영한 것임을 보여준다.
단군조선을 포함한 고조선사 인식에서 제기되는 또 하나의 문제는 강역 문제이다. 여기에는 대동강중심설(大同江中心說) · 요동중심설(遼東中心說) · 이동설(移動說)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이동설은 요동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고조선의 중심지가 이동되었다는 주장으로 근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견해들은 각각의 관점과 고조선을 인식하는 기본 입장의 차이에서 나타난 것인데, 단군조선보다는 이를 계승한 이른바 기자조선 및 위만조선, 그리고 한사군(漢四郡)의 지리 고증 등의 측면에서 논쟁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들 견해는 관련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의 재검토가 필요한 바, 일반적으로 정치적 변화 추세에 따른 강역의 변화를 상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