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죽고 12세의 어린 왕세자가 즉위하자, 이 때부터 조정 안에는 불안한 공기가 감돌게 되었다. 어린 왕의 보필을 맡은 이는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은 원로대신과 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학사 출신의 소장문신이었다.
하지만 원로대신들은 이미 칠순 고령이어서 정치 문제에 왕성한 정력을 경주할 수가 없었고, 소장문신들은 아직 관위가 낮아 국가 대사에 직접 참결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때 왕의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심복 대신을 제거하고 정권 찬탈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1453년(단종 1) 10월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亂)을 일으켰다.
이 정변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필하는 황보인·김종서 등의 대신을 주살, 제거하고 자기의 정권 찬탈의 야망을 달성한 폭력 행사였다. 이 정변으로 단종의 보좌 세력은 전부 제거되고 수양대군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수양대군의 추종 세력인 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권람(權擥)·홍윤성(洪允成) 등은 1455년 윤6월 수양대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단종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그러자 과거에 세종·문종에게 특별한 은총을 받았던 집현전학사 출신인 성삼문·박팽년·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 등 문관은 무관인 유응부(兪應孚)·성승(成勝)·박쟁(朴崝) 등과 모의, 상왕(上王: 단종)을 복위시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집현전학사 출신 문관이 주동이 되어 단종 복위거사를 모의한 것은 1455년(세조 1) 10월경이었다. 즉, 책명사(冊命使)인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겠다고 통고한 이후부터 진행되어, 1456년 6월 초하루 창덕궁의 명사신 초대연의 자리에서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날 세조 제거의 행동책을 맡은 별운검(別雲劍: 임금의 신변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무신)이 갑자기 제외되어 거사 계획은 실행 일보 전에 일단 실패하게 되었다. 이에 거사 주동자들은 거사 계획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있었는데, 동모자의 한 사람인 김질(金礩)과 그의 장인 정창손(鄭昌孫)의 고변으로 사육신과 그 밖의 연루자가 모두 처참(處斬)되고 단종 복위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