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고유의 음악을 말하는 향악(鄕樂)의 대어(對語)로 쓰여 왔다.
(1)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 음악의 두드러진 특색은 당악의 수입에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64년(문무왕 4) 3월 “성천(星川)·구일(丘日) 등 28명을 웅진부성(熊津府城:지금의 公州)에 파견하여 당악을 배우게 하였다.”는 기록에서 ‘당악’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온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당악이 있었으리라는 보다 구체적인 확증은, ≪삼국사기≫ 악지에 대금(大笒)에서 사용된 조(調)로 평조(平調)·황종조(黃鐘調)·월조(越調)·반섭조(般涉調) 등 당나라의 조명(調名)을 그대로 쓰고 있고, 더욱이 당악에 쓰이는 박판(拍板:나무로 만든 박)이 당악 이외의 향악에서까지도 사용되었으며, 무인(舞人)의 복식에 방각복두(放角幞頭)와 같은 당나라의 복식제도를 채용했다는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사≫에 의하면 당악은 당나라의 음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려 때 송나라에서 수입된 음악도 포함하여 일컫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세종 때 박연(朴堧)은 <청용화악급아조가곡소 請用華樂及我朝歌曲疏>에서 “그 당악의 일부는 곧 중국 속부(俗部)의 음악이다.
그 음악의 이름을 세상에서는 당악이라고 일컫는데, ‘당(唐)’ 자는 한(漢)·당이라는 중국 조대(朝代)의 명칭상의 구별이 있는 이상, 역대 중국의 음악을 모두 당악으로 호칭한다면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당악이라는 명칭 대신 ‘화악속부(華樂俗部)’라고 고쳐서 일컫게 하시기 바란다.”고 하였으니, 당악이 당나라 때의 음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악에 관한 문헌자료는 비록 영성하지만 그 밖에 여러 유물에 당악기가 보인다. 즉, 충청남도 연기군에 있는 비암사(碑巖寺)에서 발견된 석비(石碑)에서 요고(腰鼓)·퉁소[洞簫]·쟁(箏)·소(簫)·횡적(橫笛)·비파(琵琶) 등의 그림이 보이는데, 여기의 비파는 곡경비파(曲頸琵琶)로 당비파(唐琵琶)인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이 비석의 건립이 대개 문무왕대로 추정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 당악에서 중요한 당비파의 전래는 당연한 추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725년(성덕왕 24)에 제작된 상원사(上院寺) 동종(銅鐘)의 중앙부에 생(笙)과 공후(箜篌)를 연주하는 천인(天人)이 있고, 그 상대(上帶)에는 쟁, 그리고 하대(下帶)에는 당비파와 요고를 연주하는 악천(樂天)이 있다.
이 밖에도 772년(혜공왕 8)에 만들어진 경상북도 문경시에 있는 봉암사(鳳巖寺)의 지증대사적조탑(智證大師寂照塔)에도 생·당비파·피리[觱篥]·횡적·박판 등의 악기가 보인다.
그런데 현재 미국 시카고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 당나라 주문구(周文矩)의 <주악도 奏樂圖>에는 당비파·공후·쟁·방향(方響)·생·박판·대고(大鼓) 등의 악기가 보이는데, 이들을 위의 유물에서 보이는 당악기와 비교해보면 통일신라 때 당악기의 대부분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 鄕樂雜詠> 5수에는 중국계 음악과 서역계 음악이 포함되어 있다. 5수는 <금환 金丸>·<월전 月顚>·<대면 大面>·<속독 束毒>·<산예 狻猊>인데, 이 중에서 <월전>·<속독>·<산예>가 서역계의 것이고, <금환>은 중국 한나라의 산악(散樂)이다.
그런데 이 서역계·중국계를 합하여 향악이라고 불렀던 것은 당악이 소개되자 그 이전의 모든 음악을 이것과 구별짓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향피리에 대한 당피리, 향비파에 대한 당비파가 있는 예를 보아도 당나라의 그것들이 향(鄕)의 것에 맞설 정도로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범패에도 당풍(唐風)이 있었다. 830년(흥덕왕 5) 진감(眞鑒)이 귀국하여 옥천사(玉泉寺:지금의 쌍계사)를 짓고 범패를 가르쳤는데, 진감과 거의 같은 시대 사람인 일본 승려 원인(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 의하면 중국산둥반도(山東半島)등주(登州)에 적산원(赤山院)이라는 신라인의 절이 있었는데, 그 절에서 부르던 범패에는 당풍·향풍(鄕風:신라풍)·음성(音聲)이 일본과 같은 것 등의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당풍은 당나라 때 생긴 비교적 새로운 범패이고, 일본의 음성과 같다는 범패는 당나라 이전에 우리 나라를 경유하여 일본에 건너간 범패로 추측할 수 있다.
즉, 당시 당나라 이전의 범패는 일본에만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당악이 중국과 우리 나라에는 이미 없어졌고, 오직 일본에만 남아 있는 사실과도 일치한다.
또한, 우리 나라에서 말하는 당악이 당나라 때의 음악이기보다는 고려 때 중국 송나라에서 유입된 사악(詞樂)이 주종(主宗)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다.
사악은 송나라의 ‘사(詞)’라는 시형으로 되어 있고 가사(歌詞)가 있는 기악곡을 말하며, 당악 대곡(大曲)은 본래 가무희(歌舞戱)의 개장(開場)과 수장(收場), 즉 그 시작과 종결을 알리는 치어(致語)와 구호 등 몇 가지 단사(單詞)의 결합으로 구성되었다.
(2) 고려시대
고려조에 당악을 직접 수입한 시기는 광종 때였다. 그것은 1413년(태종 13) 12월 예조에서 아악을 정하면서 “전조(前朝:고려) 광왕(光王:光宗)이 사신을 보내 당나라의 악기와 악공을 청하여 그 자손이 대대로 그 업을 지키게 하였다.”는 글을 올린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송나라 사악의 전래는 그 뒤 문종 때 교방(敎坊)의 여제자(女弟子)가 새로이 전하는 <답사행가무 踏沙行歌舞>가 그 시초이다. 즉, 1073년(문종 27) 2월 교방에서 여제자 진경(眞卿) 등 13명이 전하는 <답사행가무>를 연등회(燃燈會)에서 쓸 것을 상주(上奏)하여 문종의 재가를 얻어 실시하였다.
또, 그 해 11월 팔관회(八關會)에서 교방 여제자 초영(楚英) 등이 새로 전하는 <포구락 抛毬樂>·<구장기별기 九張機別伎>를 연주했는데, <포구락>은 제자 13인이요, <구장기별기>는 제자 10인이었다.
1077년 2월 연등을 하고 임금이 중광전(重光殿)에 거둥하여 교방 여제자 초영의 <왕모대가무 王母隊歌舞>를 보는데, 일대(一隊) 55인이 춤을 추어 ‘군왕만세(君王萬歲)’ 또는 ‘천하태평(天下太平)’의 네 글자를 지었다.
이것은 당나라 단안절(段安節)의 ≪악부잡록 樂府雜錄≫ 무공조(舞工條)에 나오는 자무(字舞)의 일종이다. 이 중 가무희를 곁들인 이른바 대곡으로는 <헌선도 獻仙桃>·<수연장 壽延長>·<오양선 五羊仙>·<포구락>·<연화대 蓮花臺> 5종(種)이고, 그 무악(舞樂)에 편입되어 가창되는 곡으로는 <보허자 步虛子> 등이 있었다.
≪고려사≫ 악지에는 송나라에서 들어온 사악 43곡의 곡명이 실려 있다. 즉, <석노교곡파 惜奴嬌曲破>·<만년환만 萬年歡慢>·<억취소만 憶吹簫慢>·<낙양춘>·<월화청만 月華淸慢>·<전화지령 轉花枝令>·<감황은령 感皇恩令>·<취태평 醉太平>·<하운봉만 夏雲峯慢>·<취봉래만 醉蓬萊慢>·<황하청만 黃河淸慢>·<환궁악 還宮樂>·<청평악 淸平樂>·<예자단 荔子丹>·<수룡음만 水龍吟慢>·<경배악 傾杯樂>·<태평년만 太平年慢>·<금전악만 金殿樂慢>·<안평악 安平樂>·<애월야면지만 愛月夜眠遲慢>·<석화춘조기만 惜花春早起慢>·<제대춘만 帝臺春慢>·<천추세령 千秋歲令>·<풍중류령 風中柳令>·<한궁춘만 漢宮春慢>·<화심동만 花心動慢>·<우림령만 雨淋鈴慢>·<행향자만 行香子慢>·<우중화만 雨中花慢>·<영춘악령 迎春樂令>·<낭도사령 浪淘沙令>·<어가행령 御街行令>·<서강월만 西江月慢>·<유월궁령 遊月宮令>·<소년유 少年遊>·<계지향만 桂枝香慢>·<경금지영 慶金枝令>·<백보장 百寶粧>·<만조환령 滿朝歡令>·<천하악령 天下樂令>·<감은다령 感恩多令>·<임강선만 臨江仙慢>·<해패령 解佩令> 등이다.
이 가운데 대부분이 만(慢)이나 영(令) 등 특수한 악조(樂調)의 이름을 달고 있는데, 만은 대개 전단(前段)과 후단(後段)을 합하여 59자 이상이 되고, 1구가 16자 이내로 된 것으로 <억취소>·<수룡음> 등이 이에 속한다. 만의 사(詞)는 1구의 자수(字數)는 불규칙하지만 그에 붙인 음악은 규칙적으로 16박(拍)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이와 반대로 영은 만보다 자구(字句)가 짧아서, 전단과 후단을 합하여 거의 58자 이내이고, 1구는 7자 이내이다. 예를 들어, <낙양춘>은 불규칙적인 길이를 가진 가사가 규칙적으로 8박에 붙여지고 있다. 즉, 1구 8박이 4박과 4박으로 2분되고, 제4박과 제8박에는 규칙적으로 박을 친다.
≪고려사≫ 악지에 나오는 <헌선도>·<수연장>·<오양선>·<포구락>·<연화대> 등의 대곡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전하나, 송나라의 사곡(詞曲) 중 만으로 된 곡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또한, ≪고려사≫ 악지에 나오는 사곡 <낙양춘>은 송나라 때 구양수(歐陽脩)의 작품이고, <하운봉> 외 7곡은 유영(柳永)의 작품인 것으로 미루어, 대개 11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고려에서 유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1076년에는 대악관현방(大樂管絃房)을 두고 여기 매인 악사(樂師)의 식록(食祿)을 정하였는데, 그 직종을 보면 당무(唐舞)·창사(唱詞)·생·비파·장구·당적·향·당비파·방향·중금(中笒)·가무박(歌舞拍) 등이다. 이로써 보면 향비파와 중금을 제외하고는 모두 당악에 사용하던 당악기임을 알 수 있다.
그 뒤 1114년 송나라 휘종(徽宗)이 보내 온 신악기는 철방향(鐵方響)·석방향(石方響)·비파·오현(五絃)·쟁·공후·피리·적·지(篪)·소·포생(匏笙)·대고·장구·박판 등으로, 이 중 지·소 2종이 아악기에 속하고 나머지는 모두 당악기에 속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 악지에 의하면 당악기가 방향·퉁소·적·당적·비파·아쟁·대쟁·장구·교방고·박 등으로 제한되어, 그 전에 쓰이던 공후·생이 빠지고 퉁소·아쟁·대쟁 등이 편입된 것이 주목된다.
당무는 곧 당악(唐樂)정재(呈才)로서 역시 ≪고려사≫ 악지 당악조에 보이는 대곡인 <헌선도> 등 5종으로, 우리 고유의 무악(舞樂)인 향악 정재의 대칭 개념이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당악은 순수한 가악(歌樂)으로 또는 정재의 반주음악으로 활발히 연주되었다. 1434년(세종 16) 이후의 당악 전승 상황을, 1447년 6월에 편찬된 ≪속악보 俗樂譜≫와 1471년(성종 2)에 편찬된 ≪경국대전≫ 및 1759년(영조 35)에 서명응(徐命膺)이 편찬한 ≪대악전보 大樂前譜≫ 등에서 조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속악보:<환환곡 桓桓曲>·<헌천수 獻天壽>·<절화 折花>·<만엽치요도최자 萬葉熾瑤圖嗺子>·<포구락>·<보허자파자 步虛子破子>·<청평악>·<오운개서조 五雲開瑞朝>·<중선회 衆仙會>·<백학자 白鶴子>·<반하무 班賀舞>·<수룡음 水龍吟>.
② 경국대전:<오운개서조>·<낙양춘>·<만엽치요도최자>·<보허자령 步虛子令>·<보허자급박파자 步虛子急拍破子>·<환환곡>·<태평년만>·<전인자 前引子>·<후인자 後引子>·<반하무>·<절화삼대 折花三臺>·<절화급박 折花急拍>·<소포구락 小抛毬樂>·<청평악>·<수룡음>·<하운봉 夏雲峰>·<억취소>·<백학자>·<헌천수>·<중선회>·<하성조 賀聖朝>·<회팔선인자 會八仙引子>·<헌천수최자 獻天壽嗺子>·<금전자만 金箋子慢>·<금전자최자 金箋子嗺子>·<서자고만 瑞鷓鴣慢>·<서자고최자 瑞鷓鴣嗺子>·<천년만세인자 千年萬歲引子>·<성수무강인자 聖壽無彊引子>.
③ 대악전보:<보허자>·<낙양춘>·<전인자>·<후인자>·<보허자관악>·<환환곡중강령 桓桓曲中腔令>·<수룡음>·<억취소>·<하운봉>·<소포구락>·<오운개서조>·<회팔선>·<천년만세 千年萬歲>·<절화>·<중선회>.
현재 전하지 않는 ≪속악보≫의 당악곡 때의 수효보다 ≪경국대전≫에 소개된 당악곡이 많고, 영조 때의 ≪대악전보≫에는 그것이 세종 때의 음악이라고 하면서도 세종 때의 ≪속악보≫보다도 훨씬 적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까지 전승된 당악곡의 수효는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다. 당악은 주로 정재 반주에 많이 쓰였으나 그 밖에도 조하(朝賀) 때 전정헌가(殿庭軒架) 또는 회례연(會禮宴)에서도 쓰였다.
세종 때의 어전예연(御前禮宴)에서 향악은 동쪽에, 당악은 서쪽에 자리하여 동서로 갈라져 연주되었으나, 조선의 당악은 고려의 그것에 비하여 곡목과 사용 악기가 감소하여 변모할 수밖에 없었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가속되는 당악의 향악화(鄕樂化)로 인하여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고려 때 들어온 당악 중 현재 전하는 곡은 <보허자>와 <낙양춘>뿐인데, 모두 향악화되었다.
(1) 당악기
≪고려사≫ 악지에는 방향·퉁소·적·피리·비파·아쟁·대쟁·장구·교방고·박 등이 당악기로 소개되었으며, ≪악학궤범≫에도 아부악기(雅部樂器)·향부악기(鄕部樂器)와 더불어 당부악기(唐部樂器)가 도설(圖說)로 나와 있는데, 그 중 당부악기는 방향·박·교방고·월금(月琴)·장구·당비파·해금(奚琴)·대쟁·아쟁·당적·당피리·퉁소·태평소(太平簫) 등이다.
이 가운데 박·장구·아쟁은 비록 당부악기로 취급되고 있으나 당악과 향악에 모두 쓰인다고 하였고, 교방고는 무고정재(舞鼓呈才)와 행진음악[行樂]에 쓰이는 것이 좀 달랐다. 월금과 해금은 당부악기에 넣고 정작 본문에는 향악에만 쓰인다고 되어 있어 주목된다.
당초 당악에만 쓰이던 당악기였지만, 점차 향악에도 겸용하게 되고, 또 해금처럼 당악에서 이탈하여 향악에만 쓰이는 악기마저 있게 되어, 자연 향악기화(鄕樂器化)하는 과정을 밟고 향악기와 다름없이 되었을 것이다.
(2) 악기편성·악곡
≪악학궤범≫에 보이는 향당교주(鄕唐交奏)라는 용어는 향악기와 당악기의 혼합 편성인 합주의 개념이지만, 현재 구전되고 있는 향당교주는 하나의 악곡 이름이다.
즉, 오늘날 <향당교주>라고 불리며 연주되고 있는 곡은, <표정만방지곡 表正萬方之曲>, 일명 <관악영산회상 管樂靈山會相> 또는 <삼현영산회상 三絃靈山會相>의 첫째 곡 <상영산 上靈山>의 처음 부분만을 변주해서 연주하고 그 이하는 원곡과 같은데, 이것은 춤의 장단에 알맞게 원곡의 리듬과 음고(音高) 박절(拍節)을 변형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