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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에, 대구에서 여상원이 『대구일일신문』을 인수하여 창간한 일간 신문.
정의
1953년에, 대구에서 여상원이 『대구일일신문』을 인수하여 창간한 일간 신문.
편찬/발간 경위

1953년 6월 1일 여상원(呂相源)이 일제 때 대구시 유일의 일간지였던 일본어판 『대구일일신문 大邱日日新聞』의 시설 일체를 불하받아 창간하였다.

내용

이 신문이 창간되기 전에는 『대구일일신문』의 모든 시설이 미군정의 적산(敵産)이었으므로 지방유지들이 번갈아 접수, 관리하며 잡다한 제호의 신문을 발행하였다. 그러나 관리권의 동요와 신문경영 경험의 부족, 자금난 등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광복 이후 8년 동안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대구일보』가 창간됨으로써 체계있고 조직적인 신문의 탄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신문은 ‘불편부당(不偏不黨)하고 신속정확한 보도, 공정한 논평을 통하여 민주국가의 완성에 일익을 담당한다.’는 기치를 내세웠다.

처음 석간 2면으로 발행되다가 같은 해 6월 29일자부터 대구지역 최초로 월 2회 4면으로 증면, 발행하였고, 1955년 창간 2주년을 맞아 지면을 쇄신하고 UPI·로이터(Reuters) 통신과 특약을 맺어 외신뉴스를 직접 수신하였다.

1959년 3월 1일자부터는 조간 2면, 석간 4면의 복간제를 단행하면서 본격적인 상업지를 지향, 사세가 신장되었으나 1960년 4월학생혁명과 노사분쟁으로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다가 1960년 11월 20일 속간되었다.

1961년 대구기독교방송과 제휴, 『대구일보』 뉴스를 방송하기도 하였다. 1962년 2월 4일부터는 매주 일요오락판 특집을 발행,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29일 화폐개혁으로 감포(甘浦) 등 지방에 소액권이 부족, 사전(私錢)이 나돈다는 기사로 관계 기자와 감포통신원이 구속되는 필화사건을 겪었다. 주요 연간행사로는 미국 돼지장학회 도미 유학교사 및 학생 선발, 대일영화상·대일광고상 등을 주관하여 개최하였다.

그러나 신문사 내의 비위사실로 인하여 1972년 3월 30일 지령 제6238호를 끝으로 자진 폐간하였다. 폐간 후 퇴직금문제로 법정문제가 생겼으나, 취업규칙에 퇴직금 지급규정의 명문화가 없는 경우 「근로기준법」상 퇴직금규정이 배제된다는 당시의 판결(대구지법 민사합의부)은 언론인들로 하여금 권익보호에 대한 각성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2001년 2월 대구신문사가 다시 설립되었고 11월 대구일보를 속간하였다.

참고문헌

『한국신문사』(최준, 일조각, 1965)
『한국신문백년』(한국신문연구소, 1975)
『한국신문백년지』(윤임술 편, 한국언론연구원,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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