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광불화엄경진본(大方廣佛華嚴經晉本)』은 동진(東晉) 시대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418∼420년에 번역하고 421년에 공표한 『화엄경』이다. 동진(東晉)시대에 번역되어 진본(晉本) 『화엄경』 또는 전체 60권으로 되어 있기에 『육십화엄경』, 60권본 『화엄경』이라고도 불린다.
『대방광불화엄경진본(大方廣佛華嚴經晉本)』은 동진(東晉) 시대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418∼420년에 번역하고 421년에 공표한 『화엄경』이다. 동진(東晉)시대에 번역되어서 진본(晉本) 『화엄경』 또는 전체 60권으로 이루어져 있어 『육십화엄경』, 60권본 『화엄경』이라고도 불린다.
동아시아에서 번역된 『화엄경』은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이 진본 『화엄경』이다. 둘째는 실차난타(實叉難陀)가 695∼699년 사이에 번역한 『화엄경』이다. 실차난타가 번역한 『화엄경』은 측천무후가 건국한 대주(大周)시대에 번역되었기 때문에 주본 『화엄경』으로 불리며, 전체 80권으로 이루어져 『팔십화엄경』, 80권본 『화엄경』이라고도 불린다. 진본과 주본의 경우 구성과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주본이 진본보다 더욱 증광(增廣)된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두 본 모두 큰 틀에서는 비슷한 구조와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모두 '화엄대경(華嚴大經)'으로 불린다. 참고로 당나라 반야(般若)가 정원(貞元) 연간 795∼798년에 번역한 『화엄경』은 주본과 진본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화엄경』의 가장 마지막 품인 「입법계품(入法界品)」만 번역한 것이다. 이 정원본(貞元本) 『화엄경』은 40권으로 이루어져 있어 『사십화엄경』, 40권본 『화엄경』으로 불린다.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진본 『화엄경』의 주요 판본은 아래와 같다.
(1) 1권 1축으로 된 판본이다. 이 판본의 마지막에는 1098년(숙종 3) 이필선(李必先)의 시재(施財)에 의하여 간행되었다는 간기(刊記)가 있다. 이 판본은 불복(佛腹)에서 나와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그러나 책머리에 적힌 권수제(卷首題)와 권차(卷次)의 일부분이 결실(缺失)되었고, 제1장과 제4장에 파손된 부분이 있다.
이 판본의 자체(字體)는 국내에 전래되는 삼본 『화엄경』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구양순체(歐陽詢體)를 사경체(寫經體)의 서법으로 적은 형태이다. 1항(行)에 17자씩 모두 24항이 새겨져 있다. 사용된 판각술은 비교적 정교하지만 착묵(着墨)은 고르지 못한 편이다. 묵색이 진하여 글자의 획이 또렷하다. 또한 개판(開板)하고 곧바로 인출한 듯 글자가 우아하고 단정하다. 지질은 저지(楮紙)로 고색창연하다. 다만 불상의 작은 틈으로 습기가 스며들어 책의 마지막 장까지 책장의 윗부분이 군데군데 얼룩져 있다. 이 판본은 간행 기록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현전하는 『화엄경』 목판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재단법인 현담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2) 권4는 권서(卷緖), 표죽(褾竹) 및 권수제부터 제12장의 20항에 이르는 부분, 권28은 권수부터 제5장의 8항까지와 제29장 이하 권축(卷軸)까지가 결실되어 있다.
이 판본의 자체는 구양순체 계통의 사경체이다. 판식은 각 장에 본문을 1항에 17자씩 24항을 새겼으며, 본문 앞의 여백에는 역경별(譯經別) 권(卷) · 장차(張次)를 표시하였다. 이러한 글자체와 판식을 비롯하여 판각의 솜씨 등이 1098년에 간행된 진본 『화엄경』 권37과 매우 비슷하다. 또한 이 책들은 간기가 남아 있지 않지만, 같은 불복에서 동시에 나온 것으로 숙종 연간에 판각하여 인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판본들은 비록 완전하지 못하지만 고려 전기의 목판 인쇄술 및 『화엄경』 판본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조병순이 개인 소장하고 있다.
(3) 1권 1첩으로 된 판본이다. 이 판본은 고려 숙종 연간에 간행된 목판본을 번각(飜刻)한 것으로 보이는 해인사 사간판본이다. 간행된 시기는 고려 말로 추정된다.
이 판본에서는 간행 당시의 표지를 확인할 수 있다. 표지에는 감색 종이에 은니(銀泥)로 보상화문을 장식하였다. 이 보상화문 한 가운데에 금니(金泥)로 장방형(長方形)을 그렸으며, 역시 금니로 " 대방광불화엄경 권제삼십팔(大方廣佛華嚴經卷第三十八)"이라는 표제명을 필사하였다. 그 아래에 진본임을 나타내는 ‘진(晋)’ 자 역시 금니로 적었다. 이 판본은 전주한지박물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