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천일은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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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통관 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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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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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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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99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은행.
개설

근대적 금융기관의 선구가 되는 민족계 은행이었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래 일본 금융업계의 대한(對韓) 진출이 뚜렷해지자, 우리나라의 지배층과 실업가들은 민족자본으로 은행을 설립하여 경제파탄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내용 및 변천

발기인은 탁지부대신과 군부대신을 역임한 심상훈(沈相薰), 농상공부대신 민병석(閔丙奭), 육군부장 민영기(閔泳綺), 법부협판 이근호(李根澔), 전환국장(典圜局長) 이용익(李容翊), 원수부군무국장(元帥府軍務局長) 조동윤(趙東潤) 등 현직 고급관료들과 송문섭(宋文燮)·정영두(鄭永斗)·김기영(金基永)·김두승(金斗昇)·박경환(朴景煥) 등 고급관료층과 밀접하였던 실업가들이었다.

민병석이 은행장이었으며, 공칭자본금 5만 6천원과 불입자본금 2만 8천원으로 1899년 1월 발족하였다. 그러나 이해 3월까지 불입된 주금(株金) 총액은 4,800원으로, 고급관료층에서는 민병석·민영기·이근호가, 실업인측에서는 송문섭·김두승·김기영 등 9명이 각각 400원씩 불입하는 정도였다.

이와 같이, 은행 설립에 필요한 주금 불입에 있어 고급관료들보다 실업인들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으나, 나머지 자본금의 불입이 여의치 않아 정부로부터 국고금 5만원을 5년 상환기간으로 대여 받았다.

국고금 대여와 더불어 은행장에는 영친왕(英親王), 부은행장에는 이용익이 취임하게 되면서, 은행의 성격은 누구나 이용하는 일반은행이 아닌 황실이나 고위층 인사들이 주로 이용하는 특수은행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성격변화로 은행 설립의 실질적인 출자자였던 실업인들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1905년 경제계의 불황과 자본의 약소 등을 비롯한 경영상의 실패로 1906년 6월부터 약 1년 동안 휴업하게 되었다.

1906년 6월 경영 정상화를 위해 자본금을 15만원으로 증자하고 경영진의 쇄신을 위해 취체역에 김기영·윤정석(尹晶錫)·조진태(趙鎭泰)·백완혁(白完爀) 등 4명을 선출하고, 은행경영을 실업인들에게 맡겨 민영은행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인 재정고문 메카다[目賀田種太郎]의 알선으로 정부로부터 25만원의 자금을 무이자로 대여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일본인을 기용함으로써 처음으로 일본인 세력의 침투를 허용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06년 동막(東幕: 지금의 서울 마포)에 출장소를 개업했고, 1908년 남대문에 출장소를 개설하였다. 그러나 1910년 국권 상실 후, 일제의 강요로 ‘대한’이라는 용어를 폐기해, 결국 1912년 2월 상호를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하였고, 1950년 한국상업은행으로 발전하였다. →한국상업은행

이후, 1999년 한일은행과 합병하여 한빛은행을 발족하였으며, 한빛은행은 2001년 우리금융지주㈜로 편입되었다. 2002년 5월 우리은행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참고문헌

『한국금융사연구』(고승제, 일주각, 1970)
『인천부사』(인천부, 1933)
「1910년대 한국의 일반은행」(이석륜, 『경제사연구』 1, 1985)
『매일신보(每日申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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