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목판은 모두 132매이다.
오건의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강(子强), 호는 덕계(德溪). 아버지는 오세기(吳世紀)이다. 그는 남명조식의 문인으로 수학하였고, 한때 퇴계이황에게서도 공부를 배워 두 사람의 사상을 유합한 학자로 일컬어진다. 11세에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효성으로 소문이 났으며, 모친상을 당해서는 더욱 예의에 힘써 1549년(명종 4)에 예조로부터 포상을 받고, 왕으로부터 복호(復戶: 조세나 역을 면제해주는 것)를 받았다. 1552년(명종 7) 진사시에 합격하고, 1558년(명종 13)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고, 1571년(선조 4) 이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만년에 관직을 버리고 경상도 산음 덕계리(德溪里)로 낙향하였다. 이후 산천의 서계서원(西溪書院)에 제향되었다.『덕계선생문집』10권 5책은 1817년(순조 17)에 간행하였는데, 이 책판이 그때 간행할 때의 것이다.
오건의 아들 오장(?∼1616)의 자는 익승(翼承), 호는 사호(思湖)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김우옹(金宇顒)의 천거로 장현광(張顯光)과 함께 발탁되었으나, 길이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관직은 정언을 거쳐 경성판관을 지냈으며, 1613년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옥사와 폐모론을 둘러싸고 대북세력과 각축을 벌이다가 삭직당한 뒤 고향인 영남으로 퇴거하였다. 1614년 영창대군의 처형을 공격하던 정온(鄭蘊)이 제주로 유배당하자 영남의 유생들을 이끌고 반대상소를 하였다가 정인홍(鄭仁弘)의 미움을 사 토산(兎山)으로 유배당하였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문집으로 『사호집』을 남겼는데, 이 책판에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의 서문과 정지검(鄭志儉)의 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81년(정조 5) 경에 간행된 듯하다. 이 책판의 글씨는 강세황이 썼다.
『수오당실기』는 오한의 전기를 기록한 실기로서, 1864년(고종 1)에 그의 8대손 오응규(吳膺奎)가 간행하였다. 이 판목으로 찍은 인쇄본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판들은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지리 서계서원(西溪書院)에 소장되어 있다.
부자지간의 문집 책판이 남아 있는 경우는 그다지 흔하지 않으며, 책판의 내용을 통해 오건과 오장 부자의 사상과 학문적 성향을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