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초도 소작쟁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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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사건
1925년 전라남도 무안군 도초면(현 신안군 도초면)에서 일어난 소작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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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5년 전라남도 무안군 도초면(현 신안군 도초면)에서 일어난 소작쟁의.
내용

1925년 가을 악덕지주로 유명했던 문재철(文在哲)·윤영현(尹永炫)·이마이 토요지마[今井豊島]·나카지마 세이타로[中島淸太郞] 등이 소작인들에게 무리한 소작료를 요구하였다.

도초소작인회에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감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소작인회 나름대로 소작료를 결정한 뒤 이대로 집행되지 않으면 불납동맹을 일으키겠다고 지주들에게 통보하였다.

그러나 지주측에서는 이 요구를 일축했을 뿐만 아니라, 9월 하순경 집달리 3명을 보내 소작료를 내지 않은 소작인들에게 압류를 시도하였다. 이에 소작인회 조합원들이 완력으로 대항하자 집달리들은 도망하였다. 10월 7일 지주측이 다시 경관 4명을 동반하고 압류를 강행하려 했으나, 이번에도 1,000여 군중들이 대항하자 도망가고 말았다.

그 뒤 10월 11일 밤 120여 명의 무장경관이 도초면에 출동, 소작인회 지도자 김용한(金容漢) 외 20여 명을 붙잡아 가자, 1,000여 군중들이 시위를 벌이면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10여 명이 체포되고 상호간 커다란 충돌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소작쟁의의 구체적인 투쟁대상이 변하였다. 즉, 10월 19일 새벽 1시 반경 200여 명의 남녀가 목포경찰서 앞에 도착, 동지들을 구출하고자 함성을 지르며 시위를 벌였다. 비상소집된 경관들이 소작인들을 구타하여 부상자가 속출했고, 남은 군중은 목포항 부두로 내쫓겼다.

그 뒤 김용한 등이 곧바로 광주검사국으로 송치되자, 10월 22일 소작인 200여 명은 도보로 나주에 도착, 구금된 간부의 석방과 탄원을 위해 6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광주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지도자 김용한 외 2명은 최고 10개월형을 받았다.

무안군은 도초도 외에 암태도 등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지역은 1920년대 우리나라 소작쟁의의 초기 발생 지역으로서 당시에는 적화촌(赤化村)이라고도 불렸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14(독립운동사편찬원회, 1979)
집필자
신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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