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콩그룹 (com▽group)

근대사
단체
박헌영(朴憲永)을 지도자로 1939년에서 1941년 사이 경성과 경상남도 · 함경남도 지방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조직.
정의
박헌영(朴憲永)을 지도자로 1939년에서 1941년 사이 경성과 경상남도 · 함경남도 지방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조직.
개설

경성콩그룹이란 이름은 1930년대 중반경 코민테른에서 파견되어 경성 지방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권영태(權榮台)의 활동을 정통 노선으로 인정하고, 그 조직이 사용하던 ‘경성공산주의자그룹’의 이름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연유하였다.

기능과 역할

이 그룹은 1930년대 실천활동 과정에서 성장한 이관술(李觀述)·이순금(李順今)·김삼룡(金三龍)·이현상(李鉉相) 등과 1920년대 조선공산당에서 성장한 박헌영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1930년대 초·중반 실천활동 과정에서 단련된 사람들로, 출옥 후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던 중 서로 결합하였다. 따라서 경성콩그룹의 결성은 당시 정세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따른 결과들로 볼 수 있다.

이 그룹에서는 일제의 패망이 필연적이며, 중일전쟁 이후 국내 반일독립운동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휴화산처럼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어 있다고 보고, 시급하게 당을 재건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았다. 동시에 이를 돌파할 자신들의 역량은 아직 빈약하며 노동자·농민의 계급의식도 박약하다고 진단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이 그룹에서는 반·분회 등에 기초한 노동·농민조합을 조직하고, 이를 기초로 당세포준비회지구 또는 지부준비회 열성자대회를 통한 당중앙 건설이라는 조직 건설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에 따라 박헌영을 지도자로 세우고 노동운동은 김삼룡이, 기관지 출판과 지도자 양성교육은 이관술이, 가두와 학생 부분은 이현상과 이남래(李南來)·김한성(金漢聲)이 책임지고 활동하였다.

이 조직에서 김태준(金台俊)·이현상·정태식(鄭泰植)이 인민전선부에 배치되어 결정적 시기의 무장봉기에 대비한 경성지방의 지도 입수, 과거 활동가들의 상황 파악과 포섭 등의 구실을 수행한 점은 특히 주목된다.

또한, 태창직물주식회사·경성스프링제작소·조선계기회사·일본정공주식회사·일흥사·매일신보사·오쓰카인쇄소(大塚印刷所)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경성제국대학·이화여자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연희전문학교·경성고등공업학교에 조직원을 두었으며, 함경도의 주을광산과 청진, 경상남도의 창원군 상남면 적색농민조합분회와 대구·부산 지역에 조직원을 파견하였다.

1940년 12월 태창직물주식회사 조직원들의 검거를 계기로 시작된 제1차 검거와, 1941년 중순경부터 시작된 학생조직에 대한 제2차 검거로 조직이 와해되었다.

의의와 평가

군사파쇼적인 일제의 전시동원 체제 아래서 3년간이나 조직사업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또한, 이들의 활동은 1945년 8·15 이후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이 재건될 수 있는 결정적 토대가 되었으며, 급격한 권력의 공백기에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활동 과정에서 좌익 세력이 그 중심으로 등장하는 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참고문헌

「박헌영과 경성콩그룹」(신주백, 『역사비평』 여름, 1991)
집필자
신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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