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단 사건 ( )

근대사
사건
1932년 10월부터 1936년 중반경까지 중국공산당이 내부의 민생단 조직원들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자행된 조선인 집단 살해 사건.
정의
1932년 10월부터 1936년 중반경까지 중국공산당이 내부의 민생단 조직원들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자행된 조선인 집단 살해 사건.
개설

민생단(民生團)은 1932년 2월에 조직되었다가 동만주의 조선인 사회가 강력하게 저항하자 7월에 스스로 해산한 친일 반공 조직이었다. 중국공산당은 민생단의 조직원들이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위원회(東滿特別委)와 유격대에 들어와 분파 투쟁과 좌경 투쟁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이에 1932년 10월부터 1936년 중반경까지 반간첩 투쟁을 전개하여 500명이 넘는 조선인이 죽었다.

역사적 배경

1932년 8월 중국공산당 연길현위원회 소속인 노두구 구위원회의 비서 ‘송노인’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1달 만에 풀려났다. 그는 체포 과정에 대해 몇 가지 의혹을 제기 받았으므로 원래의 직책에 복귀하지 못하고 지부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유격대에 체포된 통역관은 심문 과정에서 송노인을 통해 유격대의 소재를 알았다고 자백하였다. 연길현위원회는 즉각 송노인을 체포하여 고문한 결과, 20여 명이 민생단원이란 자백을 받았다. 동만주 지역의 중국공산당 조직인 동만특별위원회 내에서의 반민생단 투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경과

1936년 봄까지 지속된 반민생단 투쟁은 조선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당과 군대 조직 내에서 조선인의 비중이 가장 높았던 동만주 지역에서만 있었다. 동만특별위원회는 1935년에 당면한 긴급 임무 가운데 하나로 반민생단 투쟁을 정확히 운영하여 민생단을 없애 그 영향을 숙청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숙반위원회라는 특별 조직을 설치하였다. 숙반위원회가 민생단을 진압하는 길은 당과 공청단, 그리고 유격대를 공고화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당과 군대 조직원의 60%, 70~80%, 90%가 민생단원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돌아다니는 간부들이 있을 정도였다.

반민생단 투쟁은 시간이 갈수록 격렬해졌다. 그렇다고 체포된 사람 가운데 민생단원이라는 증거가 발견된 경우는 없었다. 오로지 강박에 의해 나온 진술에 의지할 뿐이었고, 일치한 진술을 찾기도 어려웠다. 근거 없는 반민생단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면 될수록 조선인 조직원의 희생은 늘어갔다. 일본과의 유격 투쟁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보다 반민생단 투쟁의 와중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이 더 많았다. 1931년 하반기에 당원이 1100명 정도였는데, 1935년 5월에 이르면 당원이 181명에 불과할 정도로 동만특별위원회의 세력이 급격히 줄어들어 조직의 체계가 무너졌다.

반민생단 투쟁은 민생단원이 파쟁주의자요, 민족주의자이며, 일본의 밀정이라는 관점에 입각하여 오랜 기간 동안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반민생단투쟁을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보기에 한인 민족주의자들은 3·1운동과 1920년의 경신참변 이후 분화되었으며, 이 가운데 투항하지 않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모자를 바꿔 쓰고 가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들은 원래 일반적으로 자본가 지주 혹은 부농 출신이어서 농후한 봉건성과 지역 관념을 갖고 있는 파쟁주의자였다. 파쟁주의자는 민생단의 조수이고, 일본이 혁명 대오에 진격해 들어올 수 있는 중계자이자 밀정이었다. 게다가 반민생단 투쟁을 밀어붙이던 사람들이 보기에 민족주의자들의 민족운동에 대한 각성이 그다지 높지 못하고 계몽적인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무산계급의 기초가 허약하고 투쟁도 발전하지 못하였다.

결과 및 의의

반민생단 투쟁은 동만특별위원회의 책임자인 위증민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 제5차 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와 1936년 3월 상순경에 주재한 동만특별위원회와 제2군의 영도간부회의, 즉 미혼진회의(迷魂陣會議)를 계기로 사실상 정지되었다. 국제공산당과 중국공산당 대표단은 확대화를 반대했지 투쟁을 정리하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조선의 독립을 획득하는데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고, 조선 독립을 위해 활동하는 군대를 조직할 수도 있다고 지시하였다. 민족주의적인 투쟁과 조선 독립을 말해도 간첩으로 몰릴 위험이 사라진 것이다.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가 결성되고, 조선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이 가능할 수 있었던 전환점이 이때였다.

참고문헌

『중국지역 민족운동사』(신주백, 선인, 2005)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45)』(신주백, 아세아문화사, 1999)
『1930년대 연변 민생단사건연구』(김성호, 백산자료원, 1999)
집필자
신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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