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은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연구센터(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가 동북지역 3개 성과 연합하여 동북지역의 역사와 현실의 문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2002년부터 시작한 대규모 중국정부프로젝트이다.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의 약칭으로, 동북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실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사회주의 중국의 통일 강화를 명분으로 추진된 학술연구이지만, 한국인의 뿌리에 해당하는 이 지역에서의 한민족 역사 형성과정을 부인하는 역사인식을 드러내었다. 이에 한국 정부는 동북아역사재단을 출범시켜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처하고 있다.
동북공정이란 중국정부의 핵심 싱크탱크인 중국사회과학원에 설치한 중국변강사지연구센터(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가 동북지역의 3개 성(省)과 연합하여 시작한 대규모 프로젝트이며,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이다. 우리말로는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실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프로젝트’이다.
동북공정은 통일적 다민족국가인 중국의 변강을 안정시키고 민족들을 단결시켜 사회주의 중국의 통일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추진된 학술연구이다. 그러면서도 국가의 영토와 변경, 주권에 관계되는 정치프로젝트이고, 동북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이지만 전국적인 성격도 갖고 있으며, 중국 내부와 더불어 국제관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프로젝트이다.
2000년 12월 중국공산당 중앙이 승인하고, 2002년 2월 28일부터 시작되었다. 동북공정의 과제영역은 일반 연구과제, 번역과제, 당안(檔案)정리과제, 응용과제, 자료실 구축으로 구분된다. 과제들은 위탁과제와 공모과제로 구분되어 운영되었다. 위탁과제의 비중이 더 높았지만, 과제선정 내용이나 위탁상황에 대해 비공개로 진행하였으며, 응용과제의 내용도 공개하지 않았다.
공개된 과제들의 연구영역을 보면, 중국 강역이론 연구, 중국 동북지방사 연구, 동북민족사 연구, 중조관계사 연구, 중국 동북변강과 러시아 극동지역 정치경제 관계사 연구가 있었다. 특히 전통적인 한국의 역사, 또는 현재 및 미래의 한반도와 관련된 부분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 때문에 한국사회도 동북공정에 큰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인의 역사적 형성과정을 부인하는 중국의 연구프로젝트에 한국사회는 강력히 반발하여 외교문제화하였다. 한국정부는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처하기 위해 2004년 3월 고구려연구재단을 발족하였다.
2001년부터 매년 역사교과서 등을 통해 역사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일본의 움직임에도 종합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2006년 9월 동북아역사재단을 출범시키면서 고구려연구재단을 여기에 흡수통합하였다.
중국 당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한 배경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중국은 장기적인 국가 전략과 관련하여 국가의 안전을 동북공정의 직접적인 목표로 강조하였다. 동북공정을 추진할 당시 중국은 ‘소강(小康)사회’ 건설에 주력하는 목표를 두고 있어 안정적인 주변 환경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국가의 안전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미국과의 협력에 기초한 대외전략을 추진하고 있으며, 변강문제와 소수민족문제도 현상을 타파하기보다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따라서 중화패권을 구상하는 차원에서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둘째, 중국은 동북지역의 내외적 요인에 대응하여 새로운 정책적 조치가 필요하였다. 중국은 낙후한 동북지역을 개발하여 국토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면서 지역 간 격차를 해소하여 지역안정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세계적인 차원에서 냉전이 해체되면서 중국과의 교류도 시작되었다. 특히 무역과 선교, 역사유적지 탐방 등을 통해 한국인의 동북 진출도 매우 활발해졌다.
그 지역에는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유일하게 모국(母國)을 가진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조선족사회에 한국의 영향이 크게 증대해 갔다. 중국 당국으로서는 한반도와 접경한 지역이 민감한 변경지역으로 대두한 것이다.
셋째, 중국은 북한의 핵위기를 비롯하여 한반도의 정세변화가 동북지역의 변경 안정과 밀접히 연관된다는 차원에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중국은 1994년 북핵문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북한 변수를 변경을 안정되게 관리하는 차원에서 주목하였다. 1995년부터 동북변경문제를 정치문제라는 각도에서 접근하면서 동북지역의 역사와 민족문제를 정치적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하였다.
만주를 둘러싼 남북한 사람들의 강한 민족주의 성향과 간도영유권문제의 제기도 의식하였다. 남북관계가 화해 협력 분위기로 전환되면서 통일한국의 민족주의 고양과 그것이 조선족에게 끼칠 영향에 대한 예방적 연구의 필요성도 절감하였다.
동북공정을 전담하는 핵심 기구는 1983년에 설립된 중국변강사지연구센터이다. 연구센터에는 동북의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동북 3성의 당위원회, 성 사회과학원, 동북지방에 소재한 주요 대학이 동북공정에 참가하였다. 연구센터에서는 동북공정 관련 각종 과제물을 비상설 기구인 전문가위원회를 통해 선정, 발주하고 있다.
한반도의 정세 변화에 관심을 갖고 있던 연구센터는, 1997년 ‘당대중국변강계열조사연구(當代中國邊疆系列調査硏究)’의 제3기 연구과제로 ‘한반도 정세발전과 연변지구의 안정에 관한 조사 연구’를 설정하였다.
중국공산당의 지지 아래 1997년동북사범대학과 공동으로 ‘중국변강지구역사여사회연구동북공작참(中國邊疆地區歷史與社會硏究東北工作站)’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이 동북지역 학술역량을 동원하고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2000년 12월 중국공산당 중앙은 동북지역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에 동의하였다. 이후 연구센터의 관계자들이 지린성〔吉林省〕, 랴오닝성〔遼寧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 관계자들과 여러 차례 논의를 거듭한 결과, 2002년 2월 28일부터 3월 1일까지 베이징에서 동북공정 전문가 제1차 회의가 열렸다. 동북공정은 이때부터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연구센터는 2003년 7월 지린성 사회과학원과 연합하여 ‘제2회 동북변강역사와현상및고구려학술연구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열린 최초의 대형 학술회의였다. 특히 토론회에서는 고구려가 중국의 고대 지방민족정권이라는데 합의하는 등 고구려사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토론회는 동북공정 추진자들 사이에 동북지역 역사 서술방향과 체계가 형성되는 계기였으며, 연구자들이 암묵적인 자기 검열을 본격화하는 출발점이었다.
한국사회는 2003년부터 동북공정이 고구려사를 비롯해 한국의 고대사를 빼앗고 백두산과 간도를 영원히 장악하려는 국가 프로젝트라고 비판하였다. 2004년 8월 한국과 중국의 외교 관계자가 만나 고구려사 문제의 공정한 해결을 도모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 정치 문제화하는 것을 방지할 것, 중국측은 중앙 및 지방 정부 차원에서의 고구려사 관련 기술에 대한 한국측의 관심에 이해를 표명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나감으로써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방지할 것, 학술교류의 조속한 개최를 통해 해결할 것 등 5개 항목의 양해사항을 구두로 합의하여 한중간의 역사갈등을 일단락되는 듯하였다. 중국측은 연구 결과물을 출판하는데 주춤거렸고, 한반도의 정세변화와 관련된 문제도 본격적으로 연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동북공정이 지향하는 역사인식과 관련된 출판물은 계속 간행되었다. 이에 2006년 국내 언론에서 중국의 동북공정문제를 다시 제기하면서 동북공정의 역사왜곡이 한중간 외교 현안으로 다시 부상하였다.
한국정부는 노무현대통령을 통해 중국의 총리,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양국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으므로 중국측의 사려 깊은 조치를 요구하였다. 이럴 때마다 중국측은 구두양해사항의 이행을 약속했지만, 동북공정 관련 연구 결과는 계속 출판되었다.
2007년 들어 5년간의 동북공정은 끝났다. 그러나 그것은 2002년 중앙과 지방의 기관이 연합하여 추진한 애초의 프로젝트가 끝났을 뿐이다. 지금은 동북공정을 통해 개발된 왜곡 논리를 구체화작업이 지방의 동북 3성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길림성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동북사지(東北史地)』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동북공정 관련 논문을 집중적으로 게재하고 있다. 백두산을 독점하기 위한 ‘장백산문화론’과 관광자원화의 방향에 관한 여러 주장도 이 잡지에 주로 게재되었다.
또한 2007년연변대학에 ‘동북변강지구국정(國情)조사연구기지’를 설립하여 조선족이 모여 사는 지구의 역사와 사회발전방향을 조사 연구하도록 하고 있다. 이 연구기지는 중국사회과학원이 변강지역에 설립한 최초의 국정 조사 연구 기관이다. 동북공정의 성과를 대중적으로 정착시키려는 노력도 진행되고 있다.
현재 동북 3성의 각지에 있는 고구려 관련 유물과 박물관에는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동북공정의 논리를 반영한 각종 시설물이 설치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둘러싼 한중간 역사갈등은 기본적으로 역사관의 차이에 기인한다. 중국은 국가사의 특징이 강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 그리고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에 역사가 귀속된다는 영토주권론에 입각하여 동북공정을 추진하였다. 동북공정 가운데 한중간에 가장 마찰이 컸던고구려사 인식 곧, ‘고구려사=중국사’라는 인식도 여기에 기인한다.
한국은 지형적, 문화적 영속성을 근거로 한민족 형성의 한 흐름 속에서 고구려사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기원주의적인 역사관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고구려는 독자의 천하관을 갖고 자주적으로 국가를 운영한 독립된 강대국이었다는 관점에서 역사주권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가 중국의 여러 지방정권 가운데 하나였다는 역사관과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전통 시대의 중국이란 곳은 공간적, 종족적, 문화적으로 단일한 공간이 아니었다.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명백히 달랐다는 사실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전통 시대의 중국을 동일시하는 역사관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과 영토주권론에 입각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관으로서는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과 전통 시대의 중국을 동일시하는 역사의식을 변경시킬 수 없다. 따라서 동북공정으로 드러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현재 진행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06년부터 동북공정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다. 중국 동북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와 문화라는 귀속론으로부터 중국 전체의 변강이론을 체계화하기 위한 작업의 일부로 연구 중점이 바뀌고 있다. 5년간 축적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동북 3성의 박물관, 대학, 사회과학원을 비롯한 각종 조직에서 이를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진 주체가 중앙에서 지방으로 옮겨졌다고 볼 수 있다.
동북공정은 중국이 변경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예방 차원에서 학술연구이자 정치프로젝트였다. 동북공정의 역사왜곡에 대한 한국의 반발은 주변으로부터 중국 자신의 역사인식에 대해 비판적 문제제기를 받은 최초의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