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림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주하반일유격대 당지부 서기,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1사 합동유격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7년
사망 연도
1937년
출생지
함경북도 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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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때, 주하반일유격대 당지부 서기,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1사 합동유격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본명은 공도진. 최동범이라고도 불렸다. 함경북도 온성 출신이다.

11살 되던 1917년 중국 동북으로 건너가서 길림성 화룡현 명암촌에 정착하였다.

1928년 봄, 집에서 5명과 함께 비밀회의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끌려가던 중 탈출하였다. 1929년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영안현 동경성에 파견, 농민운동을 전개했고, 뒤에 해림현으로 파견되었다.

1930년 아성현에서 농민운동을 하다가 이 곳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같은 해 11월 해구 일대에서 공산당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난 후 중국공산당의 도움으로 출옥, 당의 명령에 따라 하얼빈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순시원이 되었다.

1932년 봄, 주하현위원회를 주하중심현위원회로 재조직하고 현위원회 조직부장이 되었다. 주하중심현위원회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지도 아래 난민구제운동을 일으켜 반제선전을 전개했고, 반일회와 반제동맹 등을 조직하였다. 같은 해 가을 김책과 함께 주하현 마의하동에서 1,000여 명이 참가한 반일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1933년 초 6월 이계동 등과 의용군 손조양부대에 들어가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손조양이 일본측에 유인되어 하얼빈에서 사망한 후 손조양 부대원들이 이복림과 조상지를 암살할 계획을 꾸몄는데, 이 때문에 손조양 부대를 떠났다.

10월 10일 삼구류에서 주하반일유격대를 조직, 조상지가 대장, 이복림은 당지부 서기가 되었다. 1934년 6월 주하반일유격대를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로 재편성하고 그 곳의 당위원회 서기직을 수행하였다.

1935년 1월 반일유격전쟁을 확대하기 위해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가 삼구류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을 조직할 때 3군의 집법처장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주하현위원회에서 3군을 6개단으로 확대 편성할 때 제1단 정치부 주임이 되었다. 1936년 8월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이 동북항일연군 제3군으로 재편성되었을 때는 제1사 정치부 주임 겸 합동유격사령이 되었다.

1936년 9월 주탕연석회의에 참석했고 중국공산당 북만임시성위원회 위원과 성위원회 조직부장이 되었다. 1937년 4월 소년련과 경위련의 170여 명의 부대를 거느리고 성위원회를 도우러 가던 중 통하현 이도하자 북산에서 일본군과 괴뢰군에 포위되어 교전 중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신주백, 아세아문화사, 1999)
『불멸의 투사』(민족출판사, 1982)
집필자
신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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