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보산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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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사건
청산리 독립전쟁의 일부로서, 1920년 10월 24일 ·25일에 홍범도 및 이범석 부대가 길림성 화룡현 천보산 서남쪽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
목차
정의
청산리 독립전쟁의 일부로서, 1920년 10월 24일 ·25일에 홍범도 및 이범석 부대가 길림성 화룡현 천보산 서남쪽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
내용

1920년 10월 22일 어랑촌 전투 이후 홍범도(洪範圖)와 이범석(李範錫) 부대는 안도현 등지로 이동하기 위하여 천보산 일대를 지나다가 도중에 그 지역 은동광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을 발견하고 습격하였다. 일본군 동지대는 10월 16일 간도 지역으로 출동하면서 독립군의 수색 및 탈출을 막기 위하여 국자가, 천보산, 두도구, 용정촌 등에 부대를 파견하였다. 천보산 일대에는 73연대 2대대가 기관총 1개 소대를 포함하여 배치되었으며, 은동광 일대에는 보병 73연대 6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천보산 일대의 일본군을 발견한 독립군 연합 부대는 10월 24일 두 차례, 25일 한 차례 습격하였다. 24일 전투는 이범석 등 북로군정서 부대가, 25일 전투는 식량을 구하러 간 소수의 홍범도 부대원이 수행하였다. 독립군은 야간에 적극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적극적인 공세에 해당 독립군이 22일 어랑촌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부대로 판단하고 국자가에 있는 부대를 증원하는 등 독립군의 공세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은 이미 해당지역에서 철수한 후였다. 이후 천보산 일대에 증원된 일본군은 해당 부대를 독립군 주력 부대 중 하나로 보고, 동(東)지대가 철수할 때까지 해당 지역에서 독립군을 찾아 수색을 계속하였다.

일본군의 피해 상황은 정확하지 않지만 이들이 독립군 주력 부대로 파악할 정도로 천보산 전투는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일본군은 '전투 중 독립군 2명을 쓰러뜨렸으나 그 외에는 종적을 찾을 수 없어 추격을 종료하였다'고 전과를 보고하였다.

참고문헌

『간도출병사(間島出兵史)』(조선군사령부, 1925)
『홍범도 장군: 자서전 홍범도 일지와 항일무장투쟁』(반병률, 한울아카데미, 2014)
『항일무장독립전쟁의 군사사학적 연구-청산리전역을 중심으로』(조필군,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우등불』(이범석, 사상사, 1972)
「청산리 전역의 전개 배경과 독립군의 작전」(신효승,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6,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6)
「청산리 전역시 일본군의 군사체계와 독립군의 대응」(신효승, 『학림』 37, 연세대 사학연구회, 2016)
집필자
신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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