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광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남만임시특별위원회 서기, 남만성위원회 조직부장, 동북항일연군 간부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이칭
이칭
이상준, 장세현, 이동일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4년(고종 41)
사망 연도
1937년
출생지
함경북도 경원
정의
일제강점기 남만임시특별위원회 서기, 남만성위원회 조직부장, 동북항일연군 간부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본명은 이상준(李相俊). 장세현·이동일(李東一)이라고도 불렸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4년 함경북도 경원군의 한 중농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1918년 중국 동북 지방 훈춘현 대황구에 이사와서 살게 되었다. 1922년 용정중학교에 들어가 공부할 때부터 공산주의 활동에 참가하였다.

1925년 동만주 지방의 큰 재해로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공부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학교를 그만두고 훈춘에 있는 대황궁의 3·1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일하면서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다시 동흥중학교에 와서 공부하며 학생운동에 적극 참가, 간도 지방 청년운동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27년 초 ‘제1차 간도공산당검거사건’ 때 체포되었다가 그 해 9월 탈옥하여 유하, 반석 일대로 가서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반석 모범소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수업시간이나 졸업식 등에서 조선과 중국혁명을 역설하고, 한인과 중국인의 단결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28년 겨울 화전현 팽밀정자산골에서 300여 명의 청소년들이 참가한 단기강습반을 조직, 이 강습회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등의 이야기와 파리코뮌·10월혁명·노동절 등의 사건을 설명하였다.

1929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0년 6월 반석동부구위원회 서기가 되었고, 호란진 등지에서 군중투쟁을 적극 주도하였다. 1932년 봄 반석 동부 지구의 한인과 중국인 농민들을 지휘하여 일본에 반대하며, 소작료와 고리대를 반대하고, 지주의 식량을 빼앗아 분배하는 등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2년 4, 5월 반일투쟁의 토대 위에서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 순시원 양림의 지도 아래 반석노농의용군을 창건하였다. 1933년 봄, 일본의 대대적인 토벌에 맞서 양정우·이홍광 등과 함께 전투를 수행하였다.

1933년 5월 7일 열린 제4차 확대회의에서 현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었다. 1933년 여름,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서 중앙 「1월서한」을 전달할 때 유격대를 파견, 중앙에서 파견된 풍광을 맞이하였다.

1934년 1월 강서성 서금에서 소집되었던 제2차 전국노농대표대회의 정신과 동북 항일투쟁에 대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및 만주성위원회의 지시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회의에서 반석중심현위원회의 대표로 그간의 활동을 보고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남만임시특별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때 남만임시특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특별위원회 서기 겸 선전부장이 되었다.

1936년 여름 중국공산당 남만지구 제2차 당대표대회가 소집되었는데, 회의에서 중국공산당 남만성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남만성위원회조직부장의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1936년 겨울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부사령관 겸 제2군 군장인 왕덕태가 죽자 남만성위원회 서기 위증민이 항일연군 2군 사업을 맡게 되자 중국공산당 남만성위원회의 주요 사업을 맡게 되었다.

1937년 6월, 항일연군 제1군 당위원회에서는 당위원회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양정우와 이동광을 비롯한 간부들은 1년의 정세 변화와 그 동안의 활동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앞으로의 투쟁 방침과 과업을 제기하였다.

얼마 뒤 이동광과 양정우는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각 사(師)로 내려갔다가 홍경현(지금의 신빈현) 영릉 황토강가에서 일본군대와 맞닥뜨렸다. 이 전투에서 항일연군은 승리했지만, 이동광은 34세를 일기로 희생되었다.

참고문헌

『만주 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신주백, 아세아문화사, 1999)
『불멸의 투사』(민족출판사, 1982)
집필자
신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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